취미

드라마 모범택시 실화 바탕 에피소드(4) -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

hellokb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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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유영철은 연쇄살인 이전에도, 절도, 강간, 폭력 등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검거 당시 전과 14범이었다.

유영철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으로 인해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영철이 체포되기 30여 년 전, 김대두의 경우 범죄자의 정신적인 측면을 연구함으로써 이후의 사건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단 지적이 일부 있었지만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이뤄지지 못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3차례 (471회, 499회, 1038회) 유영철에 대해 다룬 바 있다.

 

2019년 10월 27일, 그것이 알고싶다 1188회에서 최근 유영철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나 싸이코인거 몰라?", "(교도관한테)너 하나 죽여도 난 어차피 (이미) 사형이야." 같은 말을 하며 물 끓여오라고 하거나 교도관을 폭행하고 교도관 앞에서 자해하는 등 교도관들을 엄청 괴롭힌다고 한다.

 

유영철의 생애

1970년 4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으며 곧바로 1살이 되던 해에 서울 마포구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형제로는 형 2명과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은 이란성 쌍둥이라고 한다. 함께 태어난 여동생은 1년 후 출생신고됐다. 아버지는 본처를 버리고 세컨드를 둔 상태였는데, 유영철의 어머니는 생활고 탓에 갓 태어난 유영철을 죽일 생각까지 했다.

유영철의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가 심했다고 한다. 유영철은 6살 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모와 형제들 슬하에서 자랐다. 유영철의 아버지와 계모는 밤만 되면 유영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다녔다. 그 뒤 거주지를 옮겨 어머니와 같이 살게 돼 입학을 다시 하게 된다. 결국 초등학교를 2번 입학한 셈이 되며,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서울 공덕동 일대에서 보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무렵 유영철 아버지가 죽고, 유영철과 형제들은 생모와 합쳤다. 유영철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살림을 꾸렸다. 유영철은 계모 밑에 살던 시절보다 행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한때 화가를 꿈꿨으나, 모 예술고등학교에 낙방하자 크게 좌절하였고 그 뒤로는 국제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절도사건으로 구속되어 자퇴하였다.

쌍둥이 여동생은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전교 10위권 안에 드는 학생이었고, 학교 졸업 후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유영철은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못했고, 여동생은 공부를 너무 잘했다"며 "어떻게 쌍둥이 남매가 이렇게 정반대의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유영철은 남자라서 그런지 여동생과 달리 학대를 더 심하게 받았다.

이후 수차례 절도죄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잡범이 된 유영철은 1993년 아내 황씨와 결혼을 했으나 결혼 몇달 만에 또 절도죄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출소한 유영철은 1994년 여름 아들이 태어난 뒤에는 사진관에서 일하며 평범한 직업을 가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98년부터 다시 공무원사칭, 미성년자강간 등으로 교도소에서 장기간 복역하게 되면서 2000년 12월 이혼을 당하게 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유영철은 아내를 살해하려다 마음을 바꿔 무차별 연쇄살인을 하기로 마음먹고 복역 도중 정두영에 대해 자세히 다룬 월간조선 연재기사를 보고 범행수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범죄

범행 일지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2004년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살인 행각에 빠지기 이전에는 각종 절도나 금품 갈취를 했었는데 그중 한 사건은 위조한 경찰수첩으로 경찰을 사칭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업종(위에 말한 출장마사지라든가)의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뜯기도 했다. 살인을 시작한 후 단순 절도로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위조 경찰수첩이 들통나면 조사가 철저해져 연쇄살인범이라는 게 들통나 사형당할 거라 생각, 경찰서 2층에서 뛰어내려 도주를 시도하는 등 별 기행을 했다고.

살인을 본격적으로 저지르기 전에 이러한 각종 절도 전과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본인은 한 목사와의 인연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종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결국 징역 10개월 선고를 받고, 자신의 말로는 선처를 바랐는데 그게 안 되자 신도 있는 놈 편이라고 생각해 반종교적으로 돌변했다. 이는 연쇄살인의 전반부인 일련의 부유층 살해사건에서 상당수의 피해자 거주지가 교회 인근에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의 범행 일지.

- 2003년 9월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S여대 명예교수 이모 씨(72세)와 부인 이모 씨(67세)를 둔기로 살해. - 2003년 10월 9일, 종로구 구기동에서 주차 관리원 고모씨(60세, 남)의 집에 침입해 고모 씨의 아내(58세, 여) 어머니 강모 씨(82세, 여)와 고모 씨의 아들(35세, 남, 지체 장애)을 둔기로 34회를 강타해 살해.
- 2003년 10월 16일 강남구 삼성동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최모 씨(70세)의 부인 유모 씨(69세, 여)를 둔기로 살해.
- 2003년 11월 18일 종로구 혜화동의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집주인 김모 씨(87세, 남)와 파출부 배 모 씨(53세, 여)를 둔기로 살해. 증거 인멸을 위해 금고에 불을 지름. 현장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증손자가 이불에 둘러 싸여 질식 직전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 2004년 3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유영철의 자택)에서 마사지 도우미 김모 씨(25세, 여) 살해.
- 2004년 4월 14일 서울 중구 황학동의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안모 씨(44세, 남)를 안씨의 베스타 승합차로 유인해 살해. 시신은 월미도에 유기. 유기 후 범행에 사용된 승합차는 소각하여 증거를 없앴다. 20번이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고 한다. 시신은 월미도에서 기름 탱크에 담겨 불태워졌고, 뒤늦게 유족들이 겨우 몇 점을 수거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는 평소 노점상 단속 때문에 경찰서를 자주 들락거렸고, 따라서 유영철의 경찰 신분증이 가짜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는 바람에, 그 점이 유영철을 자극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4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사건 이후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한다. 그의 피살 7개월 후에 둘째 남동생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고, 다시 8개월 후 막내 남동생도 자살로 생을 마쳤다. 마지막 생존자인 셋째 남동생도 자살을 시도했으나 구사일생하여 현재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으며 겨우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연쇄살인 피해자 유가족이라는 게 알려지자 알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멀리하고 떠나가면서 사회적 고립까지 얻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아내는 현장검증 현장에서 너무나 태연한 유영철의 모습에 울부짖다가 실신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아예 잠적해버렸고, 연락이 아예 끊겨 서로 안부는 물론 생사조차 모른다고.
- 2004년 4월부터 7월까지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전화방 도우미, 마사지 도우미 등 여성 11명을 살해.

체포

유영철은 2004년 7월 15일 출장 마사지 업주의 신고로 체포되었는데, 당시 경찰은 유영철을 그냥 잡범으로 생각했고, 조사를 하면서 '전화로 불러낸 마사지사를 어떻게 했느냐?라고 질문하였다. 이때 유영철은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바로 나'라고 진술했으나,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는 척 연기하며 경찰을 혼란스럽게 만들다가 자신이 시체를 숨긴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말하고는 경찰서를 나서다 도망쳤다. 그러나 11시간 만에 영등포역에서 붙잡힌다.

조사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경무관이 와서 직접 조사하자 4건의 살인을 자백한다. 현장 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내장이 모자라는 사체가 몇 구 있어 추궁했더니 식인도 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26명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추후에 유영철 본인이 이를 부인하고 정황도 맞지 않아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수사 담당자가 밝히기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살해된 희생자는 20명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되어 이문동 살인 사건을 제외한 20명에 대한 살인죄의 유죄가 인정되어 2005년 6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현재도 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여기서 검찰의 실수를 확인할 수 있다. 유영철이야 어차피 이문동 살인사건이 유죄가 되건 말건 똑같은 사형이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의 처지가 문제인데, 만약 여기서 이문동 살인사건을 유죄로 판결하면 희생자 가족들은 영영 진범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구체적인 증거도 없으면서 상고심까지 끌고 갔고 결국 확정판결 이후인 2006년에야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이 사건을 저지른 것을 자백하고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됨으로써 뒤늦게 진범이 밝혀졌다. 표창원의 "한국의 연쇄살인(2005)"에서도 경찰 수사방향을 따라 이문동 살인사건을 유영철에 묶어 다뤘지만 당시 여기서도 범죄의 대상과 방식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밝히면서 의혹을 나타내며 서술해놨다. 물론 이 때는 정남규가 잡히지 않았을 때.

유영철은 교도소에 들어가서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우선 감방에 들어와서 동료 수감자들을 훑어보더니 "이 중에서 조폭 하나와 경제 사범 하나를 죽이겠다"고 선포해서 교도소를 발칵 뒤집어놨다. 이에 교도소 측은 유영철에게 4~5명의 교도관을 상시 붙여놨다. 2011년에는 교도관들의 목을 조르면서 "나 싸이코인 거 모르냐!"라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가 제압당해 독방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지금도 구치소에 적응을 못해 교도관들의 가발을 벗겨 망신을 주거나 화단을 파괴하는 등 일탈행위를 자꾸 저지른다고 한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아 사형 미결수로 분류되어 있지만 노무현 정부(참여정부) 집권 시기인 2007년 1월경 법무부에서 유영철에 대한 사형을 추진하다가 당시 청와대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무산된 바 있다. 이 때문에 사형제에 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은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12월 30일 23명 사형집행 이후 23년이 흐른 지금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 2007년부터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로 구분되어 있다. 2010년 기준 사형 폐지 혹은 사실상 폐지 국가는 총 133개국이며 사형 집행국은 중국, 베트남,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지 및 미국 일부 주, 일본 정도이다. 유럽연합은 사형제 폐지가 가입 조건이며, 한국은 EU와의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 과정에서 '인도자에겐 사형 집행을 포기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했다고. 물론 유럽에서 넘어온 범죄자만 사형 집행을 않겠다는 이야기지만, 외교 조약은 호혜주의가 원칙이므로 이런 형평성 문제는 적다. 실제로 중국의 경우 최근까지 마약류 유통의 혐의로 자국에 수감된 한국인을 사형 선고 및 집행을 하고 있다. 사실 미국도 연방 주나 도시들마다 사형제가 있는 주와 도시가 있고 없는 주와 도시들이 있다.

위의 발언 때문에 그를 존경시하고 의적 취급하는 미친 팬덤이 형성되었고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은 대부분 금전에 상관없이 그저 그가 죽이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유영철은 경찰 조사 중 윤락녀처럼 보이는 여성을 주로 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여성의 옷차림이 강간 및 살인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매우 잘못된 통념을 불러오게 되었다. 유영철이 고른 여자 중에 윤락녀가 있는 합리적인 이유는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기 쉬운 데다 섣불리 경찰에 신고를 못할 가능성 때문에 선택했던 것뿐, 윤락녀처럼 보이는 여성을 노렸다는 건 한때 종교를 믿으면서 색욕을 죄악시한 관념에 기초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에 저지르는 범죄와 후기에 저지르는 범죄가 어느 정도 차이점을 보인다. 초기에는 타인의 가택에 불법 침입하여 둔기를 휘둘러 살해하는 방식을 사용한 반면에, 후기에는 주로 출장마사지사를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불러들여 살해 후 사체를 훼손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주택가 CCTV에 자신의 뒷모습이 완벽히 잡혀서 신고 있던 신발 종류부터 해서 머리에 쓴 모자까지 완벽히 나열된 채로 수배되자 두려움으로 인해 범행에 소극적이 된 것이다. 또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 돈이 궁해진 데다 이혼 통보를 한 아내에 대한 원한으로 성매매 여성들을 불러 금전을 빼앗은 뒤 여성이 업주에게 스스로 '좋은 사람을 만났다. 그만둔다'며 거짓 전화를 강요하는 식으로 가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놓고는 손망치로 살해한 것이다.

 

당시 유영철이 체포된 뒤 경찰에서는 프로파일링의 승리라고 자화자찬을 벌였으나 실제로 유영철을 붙잡은 건 보도방 업주들이었다. 특정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간 여인들이 잇달아 돌아오지 않자, 몇몇 보도방 업주들이 회담을 했고 전화번호를 요주의로 분류하고 그 결과 유영철을 유인해 붙잡았다. 유영철은 꼬리가 밟힐 걸 우려해 한 번 이용했던 업소 전화번호는 다시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 각기 다른 전화번호들이 최종적으론 한 업소로 수렴된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 때 경찰은 업주들의 요청에 따라 한 명을 딸려 보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경찰)이 체포했다고 광고하면서 자화자찬하고 관계자들을 승진시켰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중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보도방 업주들은 반년 후 모조리 다 구속되고 처벌된다. 이것이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사이코패스 여부

사이코패스 판정 검사인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28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이 검사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무슨 만능 검사가 아니다. 또 사이코패스와 쾌락 살인자는 구별될 것도 일치될 것도 없다. 그저 겹칠 가능성이 낮지 않게 존재하는 서로 다른 개념일 뿐이다. 혼동하지 말자. 주된 동기에 따라 분류하면 증오범죄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유영철의 경우 본질적으로는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나 증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최다 연쇄살인마 게리 리지웨이처럼) 사명감이나 증오범죄의 표피를 쓴 쾌락살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는 주장.

 

근황

유영철이 감옥에 들어간 이래 교도관과 동료 수감자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려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교도관의 목을 졸라서 독방에 수감된 적도 있으며 교도관을 통해 야설을 밀반입한 것은 이미 유명한 사건. 그외에도 꾸준히 교화 불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살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그것이 알고 싶다와 김복준 위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근황을 보면 더 가관인데 유영철이 걸핏하면 꾀병을 부려서 혈세를 낭비하게 하며 사실상 교도소에서 교도관들 머리 꼭대기 위에 군림하며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술된 야설 밀반입 사건에 대해서도 김복준 위원은 해당 교도관이 돈이나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영철에게 하도 시달린 나머지 타협의 의도로 "이거라도 먹고 떨어져서 조용히 있으라"는 뜻에서 준 것일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정도로 유영철은 현재 형 집행법을 모조리 어기며 반성 따윈 없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재소자들을 대할 때에도 유영철은 닭고기를 먹을 때 몸통이나 날개를 먹어야 하는 특혜 같은 것을 누렸으며 "야! 나 누군지 몰라? 나야 나 사이코야. 문 열어. 너 하나 죽여도 나는 어차피 사형이야."라고 말하며 한밤중에 난동을 부리거나 "아 뜨거운 물 좀 줘봐. 커피 한 잔 마시게."라고 하면 교도관이 뜨거운 물을 끓이고, 유영철의 감방이 무섭다는 이유로 교도관이 못 들어갈 정도로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교도소 관계자는 "직원이 들어오면 물거나 침을 뱉으려고 하고 수형자라는 법적 지위와 신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 위에 산다."라고 한탄했다. 또 다른 수감 동기의 증언에 따르면, 유영철은 교도관의 팔까지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표창원, 박지선, 이수정 등 출연한 범죄 심리 분석가들 역시 이에 한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표창원 범죄심리 전문가는 “여전히 유영철은 어떤 반성이나 후회, 참회나 이런 것들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고 그를 통제하기 위해선 교도관들에게 보다 넓은 재량권을 줄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미 죽었던지 교도소에 수감 중일 거라고 의견을 냈다. 이유는 연쇄 살인범은 그런식의 제제가 없으면 결코 살인을 멈추지 못한다고. 그리고 유영철의 말은 사실로 드러나서 미궁 속에 빠진 진범 이춘재가 다른 범죄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음이 드러남과 동시에 사건명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바뀌었다.

 

출처 : 나무위키(https://namu.wiki/w/%EC%9C%A0%EC%98%81%EC%B2%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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