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1.21 사태
개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이다.
총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 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암살, 교도소 공격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한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모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9일뒤인 1월 30일에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테트 대공세와 같은 작전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서 30여 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결정이 난 것이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발단
당시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한,미,일 동맹체제가 완성이 되었고, 북한은 고립되는 형국이 된다. 특히 그 시점에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에서 같은 사회주의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김일성에게도 파병 요청을 하게 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상황 때문에 김일성은 난색을 표했지만, 간접적이나마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후 김일성이 북베트남의 도움의 일환으로 청와대 침투 계획 즉 1.21사태를 주도하게 된다.
김신조 루트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당시 1월 21일은 일요일로서 6.25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주기 위해 날짜를 계산하고 투입한 것이다.
17일
- 20:00 북방한계선 돌입
- 23:00 남방한계선 돌파
18일
- 02:00 임진강 북쪽에서 1숙영지를 편성.
- 21:00 1숙영지 출발
- 22:00 임진강 빙판위를 걸어서 도섭
19일
- 05:00 파평산 부근 삼봉산 능선에 2숙영지 편성
- 14:00 즈음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고, 이에 북에 무전을 쳐서 어떻게 할 지를 물어봤으나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하여 다음의 이유를 들며 투표를 통해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1.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
2. 죄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이유
3. 우씨 형제 중 한 명이 거짓으로 김신조 일당을 인민해방을 위해 북에서 내려온 전사들이라며 환영하는 척했는데, 이에 넘어갔다는 이유
4. 어차피 작전은 금방 끝난다는 이유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살려주기로 하되,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에서 큰 포상을 받게 해주겠다"라며 행로를 북으로 알려주고 풀어주었다.
집에 온 나무꾼 형제들은 저녁식사를 하며 덜덜 떨다가, 가족들이 무슨 일이냐 묻자 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공비들을 신고하였고, 파출소에서 경찰서를 거쳐 미군과 국군에 통보되어 즉각적인 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국군은 유류품과 비트 잔여물을 확인함으로서 발언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하여 공비들의 행로를 추적, 이들이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미군 경계지역에 대한 작전권까지 이양받으며 신속하게 북한산과 서울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한다. 또한 철도, 군 인사에 대한 암살 등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서울 시 외곽과 경복궁 등 요충지에 병력들을 긴급히 배정&증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신속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동속도가 국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빨라서 공비들은 차단선을 빠져나왔다. 산악지형에서 무려 시간당 10km의 속도로 질주했던 것.
- 19:00 나무꾼들을 풀어줌
- 21:00 공비들 2숙영지 출발. 나무꾼들이 파출소에 신고. 이 시점부터 대한민국의 대응 시작.
20일
- 02:00 국군 25사단 파평산 포위, 공비들은 국군의 대응을 예상하고 속도를 높임
- 09:00 비봉 북방 도착, 3숙영지 편성
- 21:00 3숙영지 출발
21일
- 05:00 비봉 동쪽에 4숙영지 편성
- 19:00 공비들 사복 환복 후 서울 시내 돌입
- 21:55 이각현 서장이 발견
- 22:05 종로경찰서원이 검문 실시, 이어 교전 발생
국군 대응 수준이 방첩대라고 하면 열어주는 한심한 수준이었다는 낭설이 있는데,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일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공비들의 침투경로에 실제로 방첩대 건물이 있을 정도로 계획이 철저해서 이들이 방첩대라고 주장시 군경이 검문하기 어려웠을 수는 있으나 CIC라고 우기며 검문망을 그냥 통과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공비들이 21일 19:00에서 21:40분까지 서울 시내에 다니면서 검문 자체를 받은 사실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자세히는, 이들은 낮에는 쉬고 밤에 이동하는 등 산으로 침투하면서 이목 자체를 최대한 피하다가, 침투용이던 26사단 마크가 달린 국군 군복을 입고서도 마주친 나무꾼 4형제에게는 방첩대나 국군이라고 속이지 않고 오히려 연이은 침투성공에 기고만장하여 자신들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선봉대라고 알려주었다. 이후 21일 시내 돌입 전 사복으로 환복하고 코트 아래 기관단총 등의 장비를 갖추어 19:00 경에 서울 시내에 진입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군, 경 검문시 방첩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시간이 21일 19:00 경 부터인데, 이 때 우리 정부는 이들의 목적이 무려 대통령 암살인 것은 예측하지 못했기에 청와대 자체 경계는 오히려 소홀한 편이었다. 그러다가 제 2 방어선이던 경찰이 공비침투에 대비하여 서울 시내를 순찰/검문하고 있다가 천만다행으로 탐지한 것이다. 공비에 대비하여 순찰하다가 복귀하던 서대문경찰서 이각현 서장이 직접 21:55 경에 2열종대로 둘 셋씩 붙어가던 이들을 발견하였다. 이 서장은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즉시 시 경찰망에 무장공비 의심 전파하면서 관계기관에 훈련 있는지 확인, 헌병 3명 포함 병력 14명을 소집하여 짚차 2대, 트럭 1대에 태워서 차량 추적을 명령하고 30사단 작전참모에 동원병력 소집할 것을 요구하여 이에 따라 22:00부로 해당 구역에 병력 배치가 시작되었다. 무장공비들이 이 추적을 따돌리고서 마주친 최초의 검문소가 바로 후술할 두 형사가 있는 곳이다. 22:05분에 본인들은 CIC 소속으로 훈련 복귀중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나 형사들이 이상함을 감지하여 시간을 끌다가 코트 속 총기를 식별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침투 과정에서 CIC라면서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자하문 초소 전투
자하문 초소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9시 50분에 드디어 이곳을 지키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2명에게 검문을 받게 된다. 부대원들은 "우리는 CIC (당시 육군 방첩부대)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고 다그쳤지만 형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 시간이 지체됐고 무전으로 연락을 받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 이때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이를 군의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하여 벌인 일이라는데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시간도 야간이라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도 않으니 패닉하여 무작정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최규식 총경은 지근거리에서 총탄 여러 발을 맞아 현장에서 전사하였고 검문을 하며 시간을 끌던 형사 정종수 경사는 동료 형사와 함께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였으나 이후 후퇴하는 공비들의 총에 중상을 입고 이후 치료 도중 사망한다. 그 외에도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시내버스 버스기사 포함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여기서 생포된 무장공비 김춘식 소위는 치안국으로 압송되어 무장해제를 받던 도중 실수로 수류탄 핀이 뽑히는 바람에 어처구니 없게 폭사했다.(결국 사살에 포함)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 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 건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 예정이던 여성이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의 수위 등 일반인, 심지어는 참관겸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였으니... 결과적으로 의도가 있었든 아니었든 무고한 민간인들도 희생 당하기는 했다.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진행
사건 직후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 1월 23일까지 통금령이 떨어졌다.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독립가옥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하였다. 상당한 교전을 주고 받다가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라고 회유하니 결국 무장공비 1명이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도 있는데 그냥 떨어트리고 손들고 나왔다. 그가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때문에 국방부 공식기록은 '생포'였고, 세월이 흐른 후 책이나 언론에서는 '투항'이나 '자수'라는 용어도 쓰인다. 정황상 어느쪽으로 우겨도 대충 맞는 듯. 김신조는 아예 독립가옥에서 전투가 없었고 자신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발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자수가 맞다고.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 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마자 '무기는 어디에 숨겨뒀냐?'라고 물었다. 김신조의 직접 안내로 특공대원 25명은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 시의 일부 장비를 회수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016년 6월 28일 출판된 당시 방첩부대 특공대장이었던 이진삼 대위의 '별처럼 또 별처럼' 참조.)
당시는 공비들이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때의 무장 공비 사건으로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 후 자신과 함께 산악지대를 누볐던 남한 특공대원들이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자신하고 실력이 똑같았다고 한다. 김신조가 산에서 죽어라 뛰었는데도 특공대원들이 옆에 딱 달라 붙어 뛰었다고 한다.
결말
한국의 경우 한동안 추가 파병보다 내부 단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중 구정 공세에 이어 원산에서 일어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해 가뜩이나 국내에서 번지고 있던 반전 여론이 더 거세지는 역풍을 맞게 되었고, 난감해진 미국이 해결과정 중에 월남 파병을 증파할 것을 한국 정부에게 요청했지만, 북한에게서 1.21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어했던 박정희 대통령과도 마찰을 일으키게 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북한의 경우 최종 작전까지는 못했지만 한국과 미국을 깜짝 놀래키며 존재감을 인식시키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후 무장공비 침투 사건들은 1.21사태만큼 파급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들을 내부의 정적들에게 덮어 씌워 제거함으로써 체제 유지를 하는데 이용을 했고, 오히려 국내에서는 반공이 국시로 채택되는 반공사상이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의 정치적인 입장에서 라이벌들 보다 유리한 쪽으로 전개해 나감으로써, 독재 체재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가 있고, 7.4 남북 공동 성명에 이르러 완성이 되었다.
북베트남으로서도 본인들이 원하는대로 미국과 최대 파병국이었던 한국의 공격으로부터 한숨 돌리게 되는 배경이 된다. 또한 1.21사태 며칠 뒤에 베트남에서는 구정 공세로 인해 미국도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길은 2010년 2월 27일, 41년만에 민간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서울 북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김신조 루트가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어 북악하늘길의 제2산책로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또한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둘레길의 한 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완전 개방은 아니다. 이곳을 가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탐방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약해 놓고 본인확인이 안 돼서 입장이 거절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하루 입장 가능 인원도 송추 방향에서 5백 명, 우이동에서 5백 명으로 하루 1천 명의 인원 제한을 두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고 오후 4시까지 하산하여야 한다. 예약을 했는데 입장하지 않을 경우 추후 예약 시 제한될 수 있다. 현재도 이 코스는 군부대 훈련장이 있고, 행군코스로 사용되고 있어 군부대 훈련 일정이 있는 날엔 예약이 불가능할 수 있다. 평상 시에도 우이령길을 이용하면 몇몇 군인들이 이동하거나 훈련장 시설물 등을 정비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자하문 초소 전투에서 전사한 최규식 총경은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창의문 남쪽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서 있다. 그런데 정작 최규식 경무관이 순직한 곳은 그 곳이 아니다. 또한 총격이 벌어졌던 주변 지역에는 '총알소나무'라는, 당시 총격전 사이에서 15개의 탄흔이 남아 그 당시 흔적을 남긴 나무가 남아 있으며 1박 2일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 그 탄흔에 손가락을 넣자 수지로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부상 경찰관 중 정종수 경사는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창의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왼편에 순직비가 있다. 당시 소속이었던 종로경찰서 현관에는 흉상이 건립되었다.
침투부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는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여 공소취하 처리되어 구속에서 풀려난 후 결혼하고 1970년대초부터 서울의 동작구 흑석동 시범아파트에서 살다가 1970년대 중순부터 사당동으로 이사를 가서 장사를 했고, 교과서에도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밖에 다니기 어려워서 개명신청을 하여 김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개신교 교회인 성락교회에서 목사를 하다가 은퇴하고 최근에는 안보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술집에서 오줌누던 중 웬 청년한테 뒤통수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굴을 알아본 청년이 "너 때문에 군대에서 피봤다." 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김신조는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또 민간인까지 살상한 살인마가 버젓이 방송에 나온다며 김현희와 함께 욕하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많은데, 일단 김신조는 자신은 '자수'를 하였으며 직접 죽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물증도 있는데, 드보크에 숨겼던 무기들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상태여서 총과 탄창에 탄약이 모두 가득 차 있었고 총 내부에 화약흔도 없었던 것이 재판에서 증명되어서 귀순하겠다고 하자 검찰이 공소를 취하했다.
처음 이 사건 수사를 맡은 쪽이 육군 방첩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신조에 대한 공작을 철저히 해서 그가 북한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자회견을 하도록 교육 및 연출하여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생략하고 급하게 기자회견에 내보내는 바람에 위에 나온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전 국민이 기절초풍했다. 웬만해선 정치 개입 안 하던 육영수가 방첩대에 한마디하기까지 했다. 사건 직후 육군 방첩대장 윤필용 준장은 20사단장으로 좌천되고 후임 육군 방첩대장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육군 방첩대의 위세가 꺾이고, 중앙정보부가 득세하게 되었다. 육군 방첩대는 몇 달 후 육군 보안사령부로 전면개편 되었다.
이 침투 사건을 진압한 부대 중 하나가 당시는 서울지역 향토예비보병사단인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이 일로 제1땅굴을 발견한 제25보병사단과 함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동원된 장갑차의 사격으로 동료들이 사살당하면서 공비들이 패닉에 빠져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무수한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공비들의 모습과 위치를 환히 비춰준 것도 진압에 도움이 되었다.
4년 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이 때 김일성은 "청와대 습격은 우리 공화국 내부의 극렬 분자들이 임의로 일으킨 사건이오. 박정희를 죽인다고 남조선이 없어지겠소? 나를 죽인다고 우리 공화국이 없어지겠소?(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란 말이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뒤 관련자들을 모두 철직(해임)시켰소. 남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박정희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었다고 꼭 전해주시오." 라고 말했다.
당시 이 사건을 계획한 북측 인물로는 김창봉, 허봉학, 김정태 등이었는데, 이들은 대남사업으로 업적을 쌓아 김일성에게 신임을 얻고 난 뒤 김일성의 동생이자 권력 서열 2인자인 당시 로동당 조직부장 김영주를 끌어내리고 군과 당권을 장악하여 김일성의 뒤를 이으려는 욕심으로 일어났다고 알려진 내막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 이후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군부의 힘이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북이 청와대의 세부 구조를 알았던 것은 남한 내의 간첩의 도움이었다고 술회한다. 정확하게는 청와대 근무 직원의 부인이 간첩이었는데 그녀가 음부에다가 청와대 배치도를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심문 도중 어디선가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수색해 보니 종이가 음부에 들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것을 자신이 손수 적발하긴 했는데, 높으신 분들이 뭐라고 해서 풀어주었고, 그래서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 구조를 알 수 있었다는 건데... 이 사람 회고록의 신빙성은 말이 많으므로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자.
북에서 김신조가 투항하여 남한에 귀순했단 정보를 얻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수용소로 압송되어 오랫동안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귀순자들에 의하면 김신조 가족 중 일부는 사형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침투조가 사용했던 장비들(PPS-43 기관단총, TT-33 권총, F-1 세열수류탄, RPG-43 대전차수류탄, 절단기, 단검 등)은 용산 전쟁기념관과 경찰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인왕산에 숨었을 때, 이들은 등산이라는 걸 몰랐는지, 등산객들이 올라와 "야호!" 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우리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판단하고 벌벌 떨었었다고 한다, 김신조는 이때부터 탈출각을 세웠었다고 한다.
사살된 무장공비들의 유해는 반환되지 않고 파주 적군묘지에 묻혀 있다.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
위의 결말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이야기는 나왔지만, 그밖에 이 사건이 후세에 크게 남긴 영향이 몇가지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박정희의 주민등록 뒷번호는 100001이며 육영수는 200002이다.
예비군과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3사관학교가 이 사건 때문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그 후 매년 실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시 복무 기간이 축소되던 중에 있었는데 이 일로 현역병들은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3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39개월)씩 복무 기간이 연장되었다. 그 당시 제대할 날짜만 세고 있던 말년병장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병장들은 일반하사로 진급해 6개월을 더 복무했다. 복무기간 뿐 아니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 강도가 세졌고 군기가 대대적으로 확립되었다. 유격 훈련이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다고 한다. 이 때 늘어난 복무 기간은 육군은 1977년, 해/공군은 1979년이 되어서야 그 이전의 기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었다(육군 33개월, 해/공군 35개월). 다만 이 외에도 복무기간 연장과 예비군, 방위병제도는 주한 미 7사단 철수와 베트남 파병의 영향을 받았다. 비슷하게도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 민방위대가 창설되었다.
경찰 차원에서 유사시 대간첩작전 등에 동원할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청이 전투경찰순경을 창설한다. 사실 1968년 1. 21사태 이전에도 전투경찰은 존재했다. 우리가 아는 20대 초중반 청년들이 현역군복무 대신 하는 전환복무가 아닌 경찰관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당시 평균 연령 30세였고 전투현장에 투입이 안 된 것이 아니라 경험부족으로 인해 고전을 겪었다는 것이 경찰 내부 교육용 자료에서 나온다. 이 제도를 이용해 대한민국 육군과 대한민국 해군(→해양경찰청 의무경찰)의 전력을 대용하는 전환복무를 실시하게 되는데, 지금 현실은 하루하루 시위 진압하는 부대(물론 지금은 전투경찰순경제도는 폐지되어 전투경찰은 사라지고 없다.), 물론 대간첩작전이 실시될 때는 의경으로 구성된 112타격대가 출동하게 된다. 이 사건을 의식해서 그런지 '김신조 루트' 라 불리는 우이령길 서울 측 입구엔 서울지방경찰청 802의경대가 설치되어 있다.
경계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두 개 부대의 담당 구역이 맞닿는 부분을 노렸다. 이런 부분은 서로에게 떠넘기는 심리에서 허술할 것이라 판단하고 침투 지점으로 선택한 것으로, 실제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는 담당 구역이 서로 겹쳐지도록 하여 개선했다.
침투 당시 휴전선의 철책을 통과할 때, 지지대 기둥이 세워진 뒤쪽은 철조망이 잘려있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이용, 그 부분을 잘라내고 망을 걷어 올리고 들어온 뒤 다시 내려놓는 식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경계 시 철책을 일일이 흔들어서 확인하고 지지대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절차가 생겨났다.
방첩대는 그해 9월 국군보안사령부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한다.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부대가 바로 684부대. 실미도 초반부에 나오는 북한 공비들과의 교전이 이 1.21 사건이다.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전 집필한 <혁명전쟁과 대남전략>이, 사건 발생 후 이북의 대남전략을 연구하는 육사, 군, 경찰, 중앙정보부 교육기관의 교재로 채택되어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후 율곡사업의 실무진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
이 사건 때문에 북대문(숙정문)이 쭉 폐쇄되었다가 38년 만인 2006년 4월 민간에 개방하였다.
우이령 도로가 폐쇄되어 군용 작전차량을 제외한 차량들은 빙 돌아가야 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실습이 실시되었다.
여담 아닌 여담으로 당시 (주)미원에서 추석 선물세트를 출시할 때 세계 각국의 우표로 포장을 꾸몄었는데, 그 중 11개의 공산국가 우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덕택에 추석 선물세트를 회수해야 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현재 광화문 광장 앞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이 시기에 세워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좋아했던 건 유명한 이야기인데다 호국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방책으로 세우게 된다.
생존자
추정 인원이나 생사 불명 인원에 대해서는 말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시체의 신원 확인도 김신조의 입회하에서 했지만 머리가 으스러지거나 M2 화염방사기에 구워진 시체가 많아서 식별은 본인도 어려웠다고 한다.
80년대 자료에는 생사불명 1인은 북한에 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실은 32명이었는데 하나는 살고 하나는 북에 올라가서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 중에는 3명이 살아서 도주했는데 박재경 외의 2명은 숙청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신조 목사는 이 한 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이후 2000년에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땅을 밟은 박재경 대장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김씨를 직접 조사했던 백동림 전 보안사(기무사) 수사과장(당시 방첩부대 수사계장·대위)은 3인의 시체를 끝내 찾지 못했으며, 후에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한 군인의 이름과 그를 영웅시하는 내용을 북한방송에서 확인했고, 여러 정황상 한 사람만 살아갔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3인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2명이 도주했다는 증언과도 일치한다.
2000년 9월 11일, 서울신라호텔 에메랄드 룸에서 열린 칠보산 송이버섯 선물 전달행사. 가장 좌측은 임동원 대통령 특보, 우측 끝은 박재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박재경 대장은 당시 송이버섯을 전달하러 방문한 김용순 특사의 수행원이었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개성 CIQ에서 박재경(좌측) 인민무력부 부부장에게 송이버섯 선물을 받고 있다. 그런데 2015년 7월, 박재경이 현영철에 이어 다음 숙청 타겟이 된 것을 알고 해외로 망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남파된 무장공비는 모두 31명이다. 28명은 교전 중 그대로 사망. 2명은 북한으로 달아나 살아남고, 김신조는 군경들에게 생포되었다.
김신조는 전향하여 귀순했고, 최근까지 서울 신길동의 성락교회에서 목사를 하다가 목사에서 은퇴하고 현재는 군대에서 안보강연을 한다.
당시 총조장이었던 김종웅 상위는 첫 교전이 붙자마자 '국방군 출동이다! 청와대 앞으로 돌격하라'라고 외쳤지만 공비들은 삽시간에 아연실색하여 각자 도주하여, 김종웅도 어쩔 수 없이 도주하였다. 무려 사흘동안 도주하다가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애기수바위에서 매복하고 있는 월남전 영웅인 천 하사의 부대에 발각되었다. 김종웅은 당시 홀로 도주하고 있었는데, 천 하사의 저격에 가슴에 2방을 맞고 쓰러지고, 오른팔 하나가 수류탄에 날아가는 상당한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상위는 남은 한팔로 수류탄을 까들고 홀로 적진부대에 돌격하다가 다시 천 하사 부대원들의 무차별적인 저격에 쓰러졌다고 한다. 당시 새벽이라 어두운 탓에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다가 천 하사의 부대가 시체를 수색하다가 김 상위의 시신을 발견, 김종웅 상위의 모습은 가슴에 세 발, 머리에 두 발, 수류탄 폭탄으로 날아간 한 팔에 몸자체가 벌집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김종웅은 남은 한팔로 수류탄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모습에 천하사 부대원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당시 회고록에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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