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hellokb 2021. 7. 20.
반응형

개요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17시 57분에 발생한 대규모 건축물 붕괴 사고.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여 사상자 약 1500명이 발생하였다.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이후 2개월 만이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8개월 만의 사고였다. 세계 건물 붕괴 관련 참사 중 사망자 11위다.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지자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주어 많은 작품들에서 소재로 삼기도 했다. 추가로,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전시관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에 위치해 있다.

또한 고객의 생명보다 자신 회사의 티끌만 한 이익을 더 중시했던 삼풍그룹의 모습에 대국민 분노가 들끓게 되었고 한편으로 이 사건은 곧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이른바 '천민자본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되기도 했다.

 

붕괴 이전의 삼풍백화점

삼풍백화점의 운영법인은 삼풍건설산업이며, 창업주 이준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의 인맥으로 강남 서초구의 군용지를 불하받았다. 이 땅은 1970~80년대 강남 개발 열풍에 급격히 발전하고 이준은 그동안 건설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때 지은 건축물 중 하나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이준은 그동안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 서초구 외인주택단지를 철거한 부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삼풍아파트를 건설하고 아파트 단지 내 근린상업지구 개념으로 삼풍백화점도 함께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단순 근린상업지구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어마어마한 규모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점했는데, 당시 전국 2위 규모 단일매장이었다.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했고 콘크리트와 유리가 조화되어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초호화 쇼핑몰 컨셉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명품 브랜드들을 대거 입점시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던 강남구,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쓸어모았다. 현재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도 당시에는 삼풍백화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대치동의 그랜드백화점 강남본점과 함께 강남지역 3대 고급백화점으로 손꼽히는 백화점이었다.

심지어 당시 삼풍백화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남 한복판의 핵심 지역이었다. 위치 자체가 교통의 요지라 2호선, 3호선의 환승역인 교대역과 가까웠을 뿐더러, 1993년 수립한 3기 지하철의 9호선 사평역 예정지 1블럭 거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근교라는 네임드급 입지를 자랑했다. 게다가 근교 강남에 (현재 신분당선 3단계의 전신인) 11호선 강남 구간까지도 예정된 핵심의 핵심이었다.

삼풍백화점은 이런 어마어마한 매장 입지와 규모를 바탕으로 공격적으로 마케팅했다. 중앙홀 4층에 있던 아트홀은 서울 시내 유명 공연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MBC 라디오 공개방송 등 다양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또 인테리어 또한 당시로서는 고급스러웠었다. 또 수입품과 사치품을 많이 판매했는데, 이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유명한 페라가모를 직수입해 판매하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직수입 브랜드들을 들여왔다. 물론 이 브랜드들은 붕괴 이후 국내를 떠난 경우가 많다.

또 B동에 수영장 같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 문화전과 이태리 문화전 같은 행사를 통해 해외 문화 및 브랜드들을 소개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붕괴 당시에는 프랑스 문화전을 준비 중이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탤런트 최명길을 모델로 대대적인 광고에 나섰고 영국에서 욕실용품 브랜드인 넥타, 이태리에서 의류 브랜드인 마리나리날디를 직수입해 별도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생활용품 전문점인 아프레미디를 자체 런칭해 백화점과 압구정동에 매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백화점 붕괴 이후, 마리나리날디 대리점 사업과 아프레미디사업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넥타'는 이후 다른 업체를 통해 매장운영을 재개했지만, 국내 매출부진으로 철수했다. 개점 초기에는 유통업 경험이 부진해서 상당히 부진한 성과를 보였고, 국내 메이저급 브랜드들이 입점을 꺼려하는 백화점이었다. 다만 이후 지속적인 개선과 해외브랜드 유치를 통해 고급화 백화점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층별 구성을 보면, 1층에는 로비와 수입품 매장, 화장품 매장이 있었는데, 삼풍이 당시 수입 브랜드 유치에 의욕적이었던지라 일반인들은 이름도 못 들어봤을 브랜드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입점했던 화장품 브랜드들 중에는 디올, 샤넬 등 명품 화장품 브랜드부터 해서 에스티 로더, 겔랑, 랑콤, 시슬리 등 지금 기준으로도 고급인 브랜드들이 많았는데, 다시 말하지만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로비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홀이라고 불리던 공간에 있었는데, 정문 쪽에는 분수대와 연결통로가 있었고 후문 쪽에는 행사 매장과 지하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가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또 중앙홀을 전망할 수 있는 유리관이 설치된 전망엘리베이터 8개도 있었다.

2층에는 여성복 매장이 있었는데 비싼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메이저급 브랜드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름 날리던 디자이너들은 웬만하면 이곳에 매장을 내었다고 한다. 3층은 남성복과 캐주얼, 스포츠 전문점이 있었는데, 이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게스나 베네통만 입어도 잘 산다던 때에 구찌, 버버리, 페라가모, 베르사체, 겐조, 막스마라 등의 수입 명품 브랜드들이 대거 입점해서 '사치 1번지'라는 오명을 쓸 정도였다. 4층 가정용품 매장은 온갖 수입 가구와 장식품, 가전제품을 팔았으며, 쓰레기통이나 수세미까지 비싼 수입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완구매장에는 레고 같은 요즘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완구들을 판매했다고 한다.

5층에는 고급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당시 방문해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콩나물국밥집(춘원)이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태리 음식점(빌라파가니니)에서 근무했던 사람에 따르면, 인기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 식품관도 비싼 식품들을 많이 팔았는데, 지하 빵집에서는 프랑스산 고급 버터와 같은 수입 홈베이킹 재료들까지 판매했었고, 나머지 음식들도 수입품이거나 대단히 비쌌다. 당시 국내에서 고급식품에 관심하는 사람이 적었음을 고려하면, 부유층이 많이 다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B동 쪽 슈퍼마켓은 논외다.

지하에는 웬디스 햄버거 매장과 올리브 베이커리가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여성 고객이 많이 몰리던 1층, 2층, 5층에는 고급 커피숍을 배치해 당시에는 드물었던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같은 각종 고급 디저트류도 취급했었다. 해마다 해외 명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하기도 했는데, 1994년 이태리 대전이란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건물 중앙에 고급 스포츠카 부가티 EB110를 전시하기도 했다. B동(레포츠동)은 '전생활관'이라는 개념으로 각종 레저시설 및 문화시설,편의시설이 위치했었다. 1~2층은 금융동을 비롯해 우체국, 여행사 등이 있었고, 일반상가도 있었다. 3층에는 갤러리와 문화교실, 4~5층은 고급 스포츠센터인 '삼풍스포츠맥스'가 있었다.

삼풍은 당시 대중적인 이미지였던 뉴코아를 제외하면 서초동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주하던 부자들은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 당시 스포츠센터 회원은 백화점 회원으로 자동 등록할 수 있었는데, 붕괴 이후 스포츠센터 회원 명단을 보니, 이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고위층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서초동 거주민들을 제외하고도 인근의 압구정동이나 송파 쪽에서도 고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백화점 맞은편 삼풍주유소가 전국 최고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삼풍이 이렇게 고가상품들을 많이 팔았던 것은 수요가 충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업으로 삼풍백화점의 매출 규모는 무섭게 성장했는데, 1991년 개점 2년 만에 두 배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 1994년에는 전국 백화점들 중 매출 규모 7위권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현재 유튜브에서 '밀라논나'로 활동하고 있는 장명숙이 이곳의 해외 명품 담당 고문이었다. 장명숙은 삼풍백화점 명품 브랜드 구성 자문은 물론, 직접 기획부터 바잉 작업, 직영 브랜드 영업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삼풍에 입점해있던 수입 브랜드들은 거의 장명숙이 입점시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붕괴된 날이 자신이 출근하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고는 다행히 피했지만, 자신의 비서와 대학동기가 사망하는 등 주변 사람들이 많이 피해를 많이 당했고, 본인에게도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라고 한다.

1993년부터는 B동 옆 주차장 부지에 빌딩을 건설해 삼풍그룹 본사 건물 겸 저층부 백화점 건물을 추가로 지어서 백화점을 더 확장시킬 계획도 있었지만, 예정대로 추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주차장 부지에 건물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까지 진행한 정황이 발견되었고, 주차장 부지 밑에는 불법 건축물이 존치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주차장 부지는 공동주택부지여서 아파트만 지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백화점 부지처럼 상업시설 건설은 애초부터 지을 수 없었다. 백화점 확장이 불가능해지자 삼풍은 오피스텔을 지어 복합건물을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때 의외로 삼풍은 삼성, 현대, 롯데, 대우 등과는 달리 이 부지를 비롯한 강남 다른 곳에 마천루를 건설하고자 하는 뜻을 전혀 비치지 않았다. 진짜 삼풍이 마천루를 지었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고급화 전략과 단일매장 전략 때문에 타 백화점보다는 매출이 부진했고 유동인구를 제대로 흡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원래는 수도권과 지방에도 지점을 추가로 내려고 했으나, 사업 과정에서 난관이 많아서 착수 기한을 미룬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경영 성과가 부진했더라도 일단 타 계열 프랜차이즈 백화점들 사이에서 버젓하게 자리를 잡고 살아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백화점의 경쟁력이 장난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만일 붕괴되지 않았으면 IMF 외환위기에 따른 도산 위기도 자력으로 극복하고 그 이후에 부도가 난 지방 백화점의 건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추가 지점을 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붕괴 이후 들어온 억대급 어음들도 다 결제해냈을 만큼 삼풍백화점 자체의 재정도 안정적인 편이었다. 물론 모기업인 삼풍건설은 자본잠식 상태인데다가 유통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본업인 건설업에 투자를 너무 하지 않아서 재정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삼풍건설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추후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현금 마련이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메이저 백화점과 비교했을 때 유동인구가 비교적 후달렸다는 것이지, 절대 파리 날리는 백화점은 아니었다. 즉 당시에 도떼기 시장마냥 사람들이 몰려든 롯데나 뉴코아랑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령 삼풍그룹이 IMF 사태를 버티지 못해 파산했다 하더라도 삼풍백화점은 이후 다른 메이져 백화점에 인수되어 21세기까지도 럭셔리한 느낌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백화점에서 세일이나 경품 행사를 하면 주변 교통이 마비되던 시절이다. 교통 문제 때문에 세일 행사를 할 때는 대중교통 이용 권장 문구를 광고에 넣도록 하고, 지하철 승차권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했어야 할 정도. 그런데 역설적으로 삼풍이 차라리 파리 날리는 백화점이었다면 이 정도로 인명 피해가 심각해지진 않았겠지만...

이렇게 외관이 크고 파격적인 강남 고급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은 사실 최악의 부실건물이었다. 붕괴 이후 외국의 건축 전문가들은 이따위로 지어놓고도 5년 반이나 버텼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1년 안에 무너져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사실 후술할 무량판 구조 공법의 강점 때문에 그나마 버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부지 용도

사고 원인에 앞서 설명할 것은 삼풍백화점 시공 계획이 세워지기 전 본래 이 부지는 주거용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삼풍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삼풍건설산업에서 지었던 외인 주택 단지의 일부였고 주거용 건물만 세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삼풍백화점은 본래 그 자리에 지어질 수 없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풍 측은 이 외인 단지를 허물고 삼풍아파트와 함께 백화점을 짓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 용도를 변경하여 공사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매우 가까운 거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까딱 잘못되면 아파트의 연쇄 붕괴로 인하여 수십 배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부지 용도 비리를 두고 붕괴 직후에는 허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붕괴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비록 삼풍백화점의 붕괴 원인은 지반이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이 건설 시작부터 철저하게 비리의 온상인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부실 공사

원래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이름으로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되어 우성건설에서 시공을 맡는 것으로 최초 발주가 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거의 완공에 가까워질 무렵 건축주인 이준은 건물 용도를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시공사에 원래 4층이었던 설계에 1층을 더 얹어 도합 5층으로 건물을 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공사인 우성건설 측은 붕괴 위험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했고, 이에 이준은 결국 우성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중도에 파기시키고 운영사인 삼풍건설산업이 시공을 이어가게끔 한다. 사실 백화점과 같은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시에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이나 이준은 수익을 위하여 건물의 안전성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구조 설계를 변경한 것이다. 만일 건축 안전법을 준수하여 무리한 설계 변경을 하지 않았더라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삼풍백화점은 무량판(Flat-Slab) 구조로 대들보가 없이 바닥이 직접 기둥으로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설계상으로는 기둥과 위층 바닥 사이에 하중 전달을 보조하는 지판(Drop-Panal)이 하나 더 설치되어 바닥 철근과 기둥 철근이 잘 연결되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지판 두께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일부 기둥은 지판 자체가 없어서 바닥과 기둥의 철근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바닥 끝쪽 철근도 ㄴ자로 꺾인 형태로 시공해서 건물 상판의 침하로 연쇄붕괴가 일어나려고 해도 철근의 끝부분이 일종의 갈고리 역할을 하여 제동장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했으나, 삼풍백화점은 갈고리 없이 끝부분을 조금 더 연장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시공했다. 백화점이 붕괴할 당시 마치 발파 방법으로 철거될 때처럼 아무런 제동 없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도 바로 이 철근의 끝부분을 ㄴ자로 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모자랐는지 삼풍백화점은 기둥들의 지름을 25% 정도 깎기도 했으며 몇몇은 용도에 따라 없애기까지 했다. 본래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당시 대표이사 문정일)가 설계한 삼풍백화점 설계도에는 기둥이 32인치(81.3cm)였으나 실제로는 23인치(58.4cm)로 시공되었다. 또한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을 설치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부분은 기둥의 4분의 1을 자르기도 하였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다. 준공 승인을 받기 전까지는 개점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임에도 삼풍건설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심지어 4층과 5층은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 층들은 90년 봄 새 단장을 맞아 오픈했다. 삼풍백화점이 정식으로 준공 승인을 받은 것은 개점 9개월이 지난 1990년 8월의 일이었다. 게다가 붕괴 8개월 전인 1994년 10월에는 기초 부분인 지하 1층에 구조 변경 공사를 했고 다음 달인 11월에는 위법 건축물 판정을 받기도 했다.

 

부실 관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건축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하중을 버틸 수 있게 설계하며, 삼풍백화점 역시 계획보다 2.5배의 하중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개장 이후부터 시행되어왔던 지나치게 잦은 용도 변경 때문에 건물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주년-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편에서 인터뷰한 당시 청소부의 증언에 따르면 휴점일에도 매장을 재배치하고 공사를 하느라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부실공사도 문제였지만, 건물의 상가 배치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불법 증축으로 추가된 5층은 개점 초기에는 비교적 바닥 하중이 가벼운 롤러장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롤러장은 고급스러운 백화점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백화점의 입장 때문에 롤러장은 무산되고 식당가가 들어섰고, 이 때문에 무게가 상당한 물건인 냉장고에 주방 기기들과 세라믹 식기들은 물론 '대한민국의 전통 식사 문화는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다'라는 시대착오적 이유로 온돌 난방 시설까지 설치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식당가 설계를 할 경우 난방 장치의 중량만 해도 건물 3층 정도를 쌓는 정도의 큰 무게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백화점 한식당은 전통적인 난방장치 대신 전기패널을 설치하고, 온돌처럼 꾸미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화점 푸드코트들이 대부분 지하에 있는 이유도 다 이 삼풍백화점 사고 때문이다. 2010년대부터는 공법과 설계기준의 상발전소화와 동선분석의 변화로 푸드코트를 지하에, 고급식당가를 최고층에 놓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 건물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킨 사업이 또 있었다. 사고 1년 전인 1994년 1월, 삼풍백화점이 2층에 '삼풍문고'라는 이름의 서점을 입점시킨 것이다. 이사나 리모델링을 경험했거나, 서점 및 도서관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바로 체감할 수 있겠지만, 보통 종이 수백 ~ 수천 장으로 구성된 책은 단위면적당 무게가 상당히 높은 물품에 속하며, 특히 대한민국 책들은 더 하얗게 하려고 종이에다 돌가루를 많이 넣고 표지도 두꺼운 골판지를 사용해서 외국 책보다 훨씬 더 무겁다. 2009년에 정해진 구조 설계 기준 백화점 2층 이상의 설계하중은 단위면적당 400kg, 서고는 750kg이다. 용도 변경으로 실하중이 초과한다면 반드시 진단 및 구조검토를 거쳐 보강 등 조치를 해야 하지만, 삼풍백화점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3월 서점은 철수해서 지하 1층으로 이사하지만, 가뜩이나 약했던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던 구조물들에 가해진 서점의 무게는 건물의 붕괴를 앞당기게 했다. 참고로, 정부대전청사는 4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도를 높여 설계했는데, 특허청의 서류 양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건축 공법이 발전해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많은 대형 서점은 대부분 건물 지하층이나 1층에 위치한다. NC웨이브 전주점이 그 예인데, 지하에 문구점인 핫트랙스와 교보문고가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백화점인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은 본관 5층에 있던 교보문고를 철수시킨 후, 몰 지하 2층에 반디앤루니스를 입점시켰다. 그리고 멀리 안 가도 이 곳 근처에 있는 반디앤루디스 신세계강남점 역시 지하 1층에 있지만,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 교보문고는 7층에, 롯데백화점 광복점은 영풍문고가 5층에 위치한다.

당시 무너지지 않은 B동은 물론 몇몇 건축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용도 변경이 있긴 했지 A동과 비교하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A동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었던 후술할 에어컨 냉각탑이 그 쪽에는 없어서 옥상은 파손되지 않았고, 원래 용도 역시 사무실 및 레포츠 센터로 계획되어 A동과 달리 기둥을 깎아내거나 줄이는 등의 무리한 설계 변경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동 건물도 기존 설계였던 4층과 달리 5층으로 멋대로 증축된 건물이었고, 바로 옆 A동 붕괴의 영향으로 안전성에 크게 영향을 받아 사고 반 년 뒤인 95년 12월 경에 B동도 철거하기로 결정되었고, 1999년 초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B동 고층 수영장의 존재는 A동 붕괴와 별개이지만, 당시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고층 수영장을 붕괴 원인으로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고, 과민하게 대응할 만한 이유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옥상에 있던 수영장을 모조리 밑으로 내려보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일도 많았다. 이 전후로 해서 고층 수영장이 없어진 백화점들 중 이전부터 수영장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마산의 성안백화점에 있던 수영장은 이전부터 매장으로 수영장 물이 새는 등 자잘한 문제가 많이 발생해서 결국은 사라졌다. 성안백화점 자체도 이후 부도로 인해 폐업되었고, 건물 자체는 리모델링 공사 후 신세계백화점 마산점으로 새로이 개장했다.

백화점 수영장들이 없어진 이유는 삼풍의 영향보다는 누수 문제와 레저 문화의 대중화로 스포츠센터가 우후죽순 생겨버린 영향이 크고, 또 고층 수영시설은 고급 호텔 쪽으로도 많이 흡수되기도 했다. 호텔은 백화점보다 고층인 경우가 많으므로, 단순히 삼풍백화점 사고 때문에 고층 건물에서 고층 수영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인 것. 허나, 롯데백화점 동래점 수영장은 현재도 운영 중이나 현대백화점 부산점과 갤러리아백화점 타임월드 수영장은 2010년 이후에 없어졌다.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로 백화점들이 높은 하중의 시설들은 고층이 아닌 저층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 사고 이후 한동안 지어진 대한민국의 모든 백화점들은 물론 대다수 상가 건물에서 푸드코트나 서점 등 하중이 무겁게 실릴 만한 시설들은 전부 지하에 설치하였다. 요즘은 건축 공법도 발전했고, 고급 식당가가 고층에 위치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배치는 아예 몽땅 지하에 있거나, 지하에 푸드코트, 최상층부에 고급 식당가로 구성하는 식이다. 당연하지만, 이 상층부의 식당들은 입식 문화인 요즘에는 굳이 온돌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사고의 결정적 원인, 에어컨 냉각탑

삼풍백화점은 앞서 소개한 대로 여러 부실공사와 운영상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사실 이 원인들만으로는 불과 5년 만에 건물이 무너질 이유로 들기엔 부족하다. 사실,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백화점 옥상에 위치해 있던 에어컨 냉각탑이었다. 이 백화점의 잘못된 냉각탑 운용이 위 문제점들이 건물에 훨씬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었고 결국 5년여 만에 붕괴사고로 이어지게 되었다.

삼풍백화점 옥상에는 에어컨 냉각탑이 3대 있었는데, 이 냉각탑들의 무게만 해도 36톤이며, 냉각수까지 채우면 무려 87톤인데, 이는 옥상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엄청난 무게였다. 이 때문에 개장 초기부터 미세한 진동과 물이 새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건설 초기에 냉각탑은 삼풍백화점 옥상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냉각탑의 소음 때문에 인근의 삼풍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백화점 측은 1989년 12월부터 1990년 정식 개장 전까지 이 냉각탑들을 반대편 우면로 측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백화점 측은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런 무거운 물건은 건물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크레인을 사용하여 한 번에 옮겨야 하지만, 백화점 측은 이동 비용을 줄이겠다며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고, 냉각탑 아래에 롤러를 장착하여 옥상 상판 위에서 천천히 끌어가며 반대쪽으로 옮기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방법을 썼다. 결국 1대당 12톤이나 되는 냉각탑을 옮기는 과정에서 옥상 바닥과 지지 구조물에 엄청난 압력을 줬고, 특히 건물 붕괴의 단초 부분이었던 5E 지주 부분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위 첫 번째, 두 번째 사진). 또한 개장 이후 냉각탑에서 발생한 진동은 옥상을 비롯한 5층 구조물에 지속적으로 전달되어 균열을 발생시켰다(위 세 번째 사진). 이것은 첫 번째 사진처럼 5층은 물론 건물 전체의 기둥까지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전조 현상

사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 위험 신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설계 후 초기 단계에서도 건물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등 붕괴의 징후를 여러 차례 보였다. 붕괴 2년 전인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 공사를 한 후 삼풍문고라는 대형 서점을 들여놓은 뒤에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대형 서점의 특성상 무게 괴물인 책장에다 또 엄청나게 많은 권 수의 그 무거운 책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건물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여름에 사고가 발생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서점을 입점한지 1년 2개월 만인 1995년 3월 2일에 지상에 있던 삼풍문고를 철수시키고 대신 지하로 옮겼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균열은 점점 심각해졌다. 중앙홀과 B동의 건물까지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면서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으며, 붕괴 당일까지 지속되었다.

또 붕괴 2개월 전인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발생했다. 5월부터 이 균열에서 미세한 콘크리트 알갱이와 골재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을 비롯해 상당수가 이러한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변변한 자가진단조차 없었다. 5월 들어 균열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자 관리자는 5층을 폐쇄하고 토목 공학자들을 불러 기본적인 검사를 한 결과 '건물 붕괴 위험이 있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이쯤 되면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접근 금지령을 내려야 정상인데, 이준 일당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위의 사진은 1995년 6월 28일, 즉 붕괴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것으로, 펀칭(뚫림 전단)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백화점 옥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펀칭은 무량판 구조의 건물에서 바닥과 지판이 기둥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중을 넘어서면서 바닥이 처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현상으로, 건물 기둥과 지판의 결속 구조가 무량판 구조물 안전성의 핵심임을 감안하자면, 당시 삼풍백화점 건물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서 건물이 본격적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의 실험에서 나무젓가락이 알루미늄 포일을 이미 뚫었음을 생각하면 된다.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균열이 발생한 천장과 바닥이 침하된 5층 식당가의 사진이다. 탁자가 기울어진 현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기울어져있다. 이미 이 시점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기고 즉시 대피시켰어야 했다.

 

사고 당일 일지

붕괴 당일 오전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오는 펀칭 현상이 목격되면서 사실상 이때부터 붕괴는 시작되었다.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이한상을 비롯한 경영진들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사태임을 직감했다.

오전 9시, 5층 식당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주인 김서정이 긴급전화를 했는데,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바닥에 돌출 부분이 2cm 정도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5층 기둥에 무려 20 cm나 되는 균열이 발견되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었다. 9시 40분, 백화점측은 바닥침하현상을 직접 확인했고, 시설부의 권유로 춘원 식당은 휴업에 들어간다.

오전 10시, A동(북관) 4층 상품의류부 직원(당시 31세)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약 3분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뒤 우동 전문점 '현지'와 냉면 전문점 '미전'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바닥이 기울면서 주방조리대가 넘어지는 일도 있었고 균열로 인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음식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낮 12시 무렵, 백화점 측은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지시켰다. 또한 5층 행사 매장의 도자기, 가구들을 각각 4층, 지하 3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시켰다.

붕괴 약 5시간 30분 전인 12시 30분경, 이한상 사장, 이영길 이사등이 5층의 균열 현장을 둘러보면서 5층의 뒤틀림으로 많게는 약 10cm까지 침하된 곳도 발견했다. 수행 중인 건축설계사는 5층 식당가와 4층 귀금속 코너의 대피를 건의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백화점 측은 5층 대부분의 점포와 4층 귀금속 코너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또한 무게와 진동 때문에 균열의 원인으로 지목된 옥상의 냉각탑 작동도 중단되었으며, 이때부터 오후 2시까지 냉각탑의 배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고 당일이었던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위치했었던 서초구에서 관측된 일최고기온은 29.0℃였으며 안개까지 껴서 체감온도 및 불쾌지수가 높았다. 더구나 냉각탑 작동이 중단되는 바람에 백화점 안은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찜통이 되었다. 붕괴 당일 삼풍백화점을 방문한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고 발생 직전에 너무 더워서 견디지 못해 쇼핑을 그만두고 백화점을 미리 빠져나가 참사를 피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

이와 관련된 일화로 당시 상품권 매장 직원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지하 사무실에서 쉬다가 굉음 소리를 듣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연기가 가득해서 에어컨이 폭발한 줄 알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비상구를 통해 B동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때 로비매장에 있던 친구가 생각나 로비 쪽을 보는 순간, 탁 트여있었던 로비가 잔해들로 막혀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대책 회의와 영업 강행

붕괴 약 3시간 전인 오후 3시경, 구조기술사 이학수가 도착하였고 백화점 임원진과 대동하여 안전 진단을 실시하였다. 이학수 기술사의 지시로 5층의 기둥과 바닥을 파보니 균열이 더욱 커져 주먹이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오후 4시에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주재로 2차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형재, 이학수 등은 해당 건물의 설계법이었던 무량판 공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며 원인 분석을 브리핑했다. 임형재 소장은 건물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되었고, 속히 영업을 중단하고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고 경영진에게 권했다.

여기서 이학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붕괴 위험은 없다.'고 보고하고 "보강 방법으로 철제 빔으로 슬래브를 받치는 방법, 기둥 주위에 철제 빔을 받치고 철제 와이어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받쳐주는 포스텐션 공법이 있다."고, 임형재가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라.'는 조언과는 상반되게 제안한 것이다. 이준은 이학수의 의견을 지지했고 영업중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봤던 이영길 이사는 나머지 이사들과 함께 다시 이준에게 즉각 고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이준이 경제적 피해를 생각하여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나머지 경영진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책회의는 백화점의 영업중지 없이 보수공사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결론이 났고, 사고의 피해를 최소화할 골든 타임은 떠나버리고 말았다. 만일 이때라도 영업을 중단하고 고객과 직원들의 대피를 실시하고 백화점 주변의 통행을 전면 통제시켰다면 건물과 기자재만 손해보고 인명피해는 거의 없는 선에서 피해가 최소화 됐을지도 모른다.

보수 계획 논의가 1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동안, 임형재는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백화점 측은 이런 위급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객들에게 전화를 돌려 행사를 안내하면서 백화점 방문을 권유하고 있었다. 하필 이날은 세일 시작 전 우수고객들을 상대로 사전세일을 하는 날이었다. 이 사전 세일도 불법에 해당한다. 실제로 백화점의 전화를 받고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결국 삼풍건설과 이준은 티끌만큼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바람에 사소한 안전을 등한시한 대가로 영원히 파멸되고 말았다. 차라리 돈이 약간 깨지더라도 안전을 감안했더라면 이준 말대로 경제적 손해는 조금 볼 수 있었을지라도 그 정도 손해는 얼마 안 가서 곧 메꿔졌을 것이다. 또한 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나마 그런 전조에 대해서 이런저런 잡음이 있었겠지만, 최소한 이렇게까지 파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영진들은 미리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당시 삼풍백화점 경영진들은, 붕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들만 백화점을 빠져나갔다.'는 설이 여전히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언론의 오보로 인해 퍼진 루머로 사실은 다르다. 청문회에 따르면, 삼풍의 임원들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장 벌어지리라는 걸 몰랐다는 것 뿐이지만.

경영진들 모두 붕괴 시점에도 대책 회의를 하느라 백화점 건물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회의실이 A동이 아니라 B동에 있었기 때문이다.(붕괴가 된 건물은 A동이었다.) 우연에 의해 목숨을 건진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은 붕괴 현장을 확인하고 넋이 나간 채 서있다가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백화점을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경영진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물론, '미리 빠져나간 게 아니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이 삼풍 경영진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백화점이 붕괴하게 된 핵심적인 원인은 경영진의 부패한 운영 방식이었다.

상술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삼풍은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여, 주거용 건물을 지어야 할 자리에 백화점을 지었다. 건축주 이준은 원래 설계에서 1층을 더 얹고자 했고, 건설사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자, 그들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삼풍건설산업로 하여금 이를 강행하게 했다. 돈에 눈이 멀어 건물의 안전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독단적으로 설계를 변경한 것이다. 게다가 불법증축으로 추가한 5층에 불법으로 식당가를 들였고, 안전 검토도 하지 않고 2층에 서점을 입점시켰다. 이 같은 만행은,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던 구조물이 부실공사로 인해 빈약해져 있는 상황에서, 건물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구조기술사 이학수가 붕괴 가능성을 일축한 것 또한 극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원인이지만, 그의 의견을 지지하고 영업 강행을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삼풍의 수장 이준이었다. 삼풍 기업이 억울하게 공중분해되고 경영진들이 부당하게 최고 형량을 받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붕괴

붕괴 약 1시간 전인 오후 5시, 4층의 천장까지 가라앉기 시작하자 백화점측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붕괴 27분 전인 오후 5시 30분, 임원실 회의장에서는 야간보수공사 준비를 위해 떠난 일부 임원들을 제외하고 회의를 계속 하고 있었다. 이때 A동으로부터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오후 5시 40분, 4층 천장이 "뚝"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5층 천장에서 시멘트가 떨어졌다.

오후 5시 47분, 다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려 4층에 있던 사람들은 비상구와 B동 방향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50분, 삼풍백화점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이때 A동 5층에 있던 이영철 부장은 야간보수공사를 준비중인 이완수 차장에게 전화로 현재 붕괴가 진행중인 것 같다고 다급하게 알렸다. 그리고 전화 1분 뒤, 건물 전체에 굉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52분, 옥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5층의 뒤틀림이 가속화되어 균열이 실시간으로 번지고 곳곳에서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5층 직원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탈출하기 시작했다.

다른 지상층에서는 다소 늦었지만 직원들이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으로 탈출할 타이밍을 놓친 사람들은 B동으로 대피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를 듣지 못해 탈출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완전 붕괴 20초 전, 옥상의 하중을 못버티고 뒤틀린 5층 슬래브가 4층 바닥으로 완전히 주저앉았고, 이 충격으로 4층부터 지하 3층까지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수직붕괴가 일어났다.

결국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옥상으로부터의 붕괴 시작 5분 만에 땅을 향해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붕괴된 A동의 측면 모습. 5층부터 1층의 지붕이 샌드위치처럼 쌓여있다. 맨 위의 단층이 5층 지붕이고, 맨 아래의 단층이 1층 지붕이다. 위에서 서술했던 부실시공 때문에 기둥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5층 지붕부터 내려앉으며 연쇄적으로 붕괴되어 지붕들이 켜켜이 쌓인 형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1~5층에 머물던 사람들 중 미처 건물 밖이나 B동으로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생존하지 못한 채 압사당했다.

지하 4층은 A동 쪽에는 없고 B동 쪽에만 있기에 붕괴되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붕괴 초기에는 뿌드등 하며 건물이 한 쪽으로 쏠리다 갑자기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에 놀란 쇼핑객들이 여기저기서 "악!", "사람 살려!"라고 소리쳤다고 하며 사고의 순간을 전했다.

부상자의 상당수는 붕괴 전 또는 직후에 자력으로 탈출하였다. 붕괴 당일 밤 사상자 집계치는 사망 22명, 부상 696명이었는데, 당일의 구조체계는 구조 작업 항목에 나오듯 매우 허술했다. 이런 구조환경 아래 당일 저녁 순식간에 700명을 모두 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니 부상자는 상당수 붕괴 직전 또는 직후에 자력으로 탈출하였거나 행인,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처음 집계치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이 탈출한 줄 알고 안도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후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사망자수를 보며 충격에 빠져버렸다.

희생자수는 총 502명이었는데 그중 직원이 306명, 그들 중 파견직원이 221명이었다. 희생자 중에 직원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우선 냉각탑 정지로 상당수 고객들이 사고 직전에 쇼핑을 포기하고 빠져나갔고, 사고 순간에도 쉽게 자리를 피하기 어려운 직원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행인들과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렸다. 주변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몇 년 후 일어난 미국 9.11 테러에 휘말린 사람들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호흡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후유증을 겪었다.

특히 호흡기 문제 부분에서 석면 문제도 심각하였는데 2009년 이전에 건설된 건물은 거의 100% 석면이 함유된 건축 자재를 상당히 많이 사용한 건물이었고, 이는 삼풍백화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상자, 구조대, 시민, 기자 등 수많은 사람이 상당량의 석면을 호흡기로 마셨다. 붕괴 당시 뉴스를 보면 사고 현장에 석면 먼지가 가득하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이다. 당시 국내 기준으로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없었다.

생존자는 대부분 지상 1~2층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때 당시 지하 1층 식품관에 있었던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그 사람들이 거의 사망했다. 지하 2층과 3층은 주차장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

거대한 먼지 구름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서초구, 강남구 전체와 잠실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저 때가 하필 초저녁 시간대라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하늘 멀리서 웬 먼지 폭풍이 날아오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를 휩쓸자 놀란 엄마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아이들을 도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 먼지폭풍은 근처의 서울고등법원과 서울지방법원 맞은 편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B동은 건물 자체는 멀쩡했지만, 붕괴 당시 먼지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진 속에서 보이듯 A동이 완전히 붕괴된 마당에 B동은 멀쩡했으나, 역시 붕괴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폐쇄 조치한 후 1998년 10월에 철거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붕괴 사고 사흘 후 실시된 현장조사 결과 B동도 마찬가지로 설계강도보다 모자라게 시공되었음을 확인했다.

 

붕괴 직후

당시엔 저렇게 큰 건물이 부실공사로 그대로 무너졌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사고가 발생한 직후 부실공사가 원인임을 알기 전까진 모든 건축가들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외부의 충격이 없이 붕괴된 모습이 이렇게도 처참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에서는 외부의 충격 없이 건물이 저런 형태로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북한에 의한 테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결국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져 여러모로 더욱 충격을 주었다.

이 참사와 가장 비슷한 유형이었던 1993년에 발생한 청주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도 부실공사가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LPG 폭발이 건물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삼풍 참사로부터 불과 2개월 전에는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4월 19일)와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4월 28일)와 광주 남구 봉선동 대화아파트 붕괴사고(2월 6일)도 발생했기에 참사 직후 초기에만 해도 테러 혹은 가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대세였다. 하지만 건설 전문가들은 붕괴 당시에도 부실 공사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여튼 붕괴 사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당시 MBC 기자였던 김은혜가 119 구조원 옷을 빌려입고 붕괴 현장에 들어가 건물의 설계도를 꺼내 와서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였음을 보도하자 온 국민이 분노했다. 사실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처럼 부실공사로 인한 폐단이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나름 돈 들여 짓겠거니 했던 백화점에서마저 이런 사고가 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인 문제였다.

반면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은 지나가던 일부 시민들은 그냥 삼풍이 무너졌다는 투로 무덤덤하게 말하고 의료진과 구조진 그리고 취재진들이 출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태연히 근처 마켓에서 쇼핑을 했다는 목격담이 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잘 몰랐고, 이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수백 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기에, 붕괴 직후에는 북한의 폭탄 테러라고 생각한 주민들도 많았으며, 저 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주민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약 400 m 떨어진 아파트 주민들은 땅이 울리는 느낌에 지진이 났다고 착각해서 경비실에 연락했다고 한다.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충격적인 말에 설마하며 그저 '백화점 신축 공사 현장에서 무거운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관공서의 전화는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하면서 불통이 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못 믿고 '건물에 금 정도 갔겠지.' 했으나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임기 마지막 날이라 송별파티를 열고 있다가 소식을 들은 최병렬 서울시장과 이틀 전 지방선거로 당선된 조순 서울시장 당선인도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그들이 아무리 고위공직자라 한들 그 현장에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넋을 놓고 펼쳐진 지옥도를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오죽하면 최병렬 시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기사, 자신의 임기에 도대체 무슨 마가 끼었는지 작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진 데 이어, 이제는 대형 백화점까지 주저앉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날까지도 유종의 미는커녕 목불인견의 대형참사가 일어났으니 울음이 터져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처참한 심정이 어련했겠는가. 다만 성수대교 붕괴 때부터 이미 부실공사 문제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는데 이를 알고도 더 큰 참사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마냥 동정만 할 수도 없다.

붕괴된 A동 중 앞쪽 일부는 무너지지 않았기에, 서둘러 대형 크레인들이 와서 쓰러지지 않도록 노력을 했다.

붕괴 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이런 참사에 대하여 사전에 마련된 대응수칙도 없었기에 초기 단계에서 사고 현장의 통제는 불가능했다. 당시의 붕괴 현장을 찍은 CCTV나 취재 동영상들에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붕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은 B동의 슈퍼마켓 계산대를 털거나 A동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이나 매몰된 상품들을 훔치는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추태를 보이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사진이자 많은 사람들이 '악마의 미소'로 기억하는 이 사진은 많은 커뮤니티에서 언급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삼풍백화점 편에서도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된 위 사진이 자료로 등장했다. 이 외에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저 사람처럼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이를 개탄하는 기사나 사설도 쏟아졌다. 당시 서초경찰서 강력반에 근무했던 한 형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 당시 절도로 입건된 사람이 무려 400여 명에 달했으며, 붕괴 사고 이후 서초경찰서에는 매일 저녁만 되면 수십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절도 혐의로 줄줄이 들어오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입건된 사람 중에는 당시 판매가 17만 원이던 바지를 무려 10벌이나 껴입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경찰의 추궁에 "추워서 입었다"라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고.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사고 발생 시기는 초여름에 해당하는 6월 하순으로 무더위가 서서히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그만큼 현장주변에 타인의 출입 통제력이 아주 엉망이었던 것이다.

백화점 위치가 부촌인 서초구에 있고 주 고객 중 부유층이나 법조인도 있어서 당시 대기업들도 자기 회사 관련자들이 휘말리지 않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실제 당시 삼성에선 박영운 삼성건설 고문과 이윤우 삼성전자 공동대표 부인, 입점업체 제일모직 직원 3명을 잃고, 김경태 삼성자동차 고문 부부도 부상을 당해 인명 피해만 35여 명에 달했다. LG 측은 입점업체 LG반도패션 점장 및 구본무의 숙모를 잃었다. 대우 측은 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 부인이 사망했다. 반면 김영원 진도그룹 회장은 목숨을 건졌다. 여담으로 대기업들 중 유일하게 인명피해가 없던 곳이 현대그룹이었는데, 임직원들 대부분이 계열사인 현대백화점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법조인 중에선 변호사 정광진은 세 딸을 잃었으며, 검사 윤연수도 부인과 두 자녀를 잃었다. 서석준 전 경제부총리의 딸 역시 변을 당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언론 보도

이 사고를 먼저 보도한 곳은 동년 3월 1일 케이블 방송 출범 이후 당시 막 개국한 YTN이었다. YTN은 저녁 6시 뉴스를 시작한지 3분 만에 앵커의 멘트로 사고 소식을 전한데 이어 4분쯤 사고현장 인근 삼호가든아파트 주민의 제보 전화를 연결, 사고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이 사고를 최초로 보도한 이상순 YTN 기자가 사고 20년 뒤 YTN 뉴스 인에 출연해 이를 회고했는데 당시 초년 기자였던 그는 백화점 바로 앞인 서울가정법원이 출입처였다. 그날도 가정법원실에 모여 기자들과 같이 판결문을 보고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 6시 즈음 바깥이 웅성거려 복도 쪽 창을 보니 백화점 건물 한 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길로 바로 회사에 "삼풍백화점 반이 날아갔습니다."라고 전화를 건 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뉴스 진행자인 호준석도 이야기를 전했는데, 당시 조순 민선 1기 서울시장 당선자의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방문을 따라갔다가 회사의 연락을 받고 사고 현장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하필 무너지지 않은 B동 쪽으로 들어와서 반대쪽(A동)이 무너진 것을 못 보고 "어? 멀쩡한데요?"라고 회사에 전화했다가 온갖 욕을 다 들었다. 물론 그 욕을 들어가며 코너를 돈 직후 한쪽이 없어진 걸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같이 참석한 경광숙 당시 도봉소방서 구조대장은 같은 날 휴일이어서 책자 발간을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나오던 중, 마침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하는 동아일보의 취재 차량을 얻어타고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동아일보 사옥이 있는 세종로사거리에서 사고현장인 서초동까지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20~30분이 걸리나, 이들이 찍은 시간은 불과 7분이었다.

YTN의 사고보도에 이어 정규방송인 SBS가 오후 6시 4분 만화 영화 <명탐정 셜록하운드> 방송 도중 자막으로 사고 소식을 전했으며, KBS1은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를 방송하던 6시 5분에, MBC는 만화영화 '개구쟁이 태즈' 방영 도중 "MBC 뉴스속보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인명피해가 클듯" 자막이 뜬 뒤 바로 MBC 뉴스속보가 나왔다. 그리고 곧 5분 뒤 사고발생을 보도한 뒤 KBS, SBS, MBC 3사 모두 사고보도를 내보내 도합 100시간 이상 생중계됐다.

사고 현장 화면을 가장 먼저 내보낸 곳은 KBS였다. KBS는 사고 발생 소식을 접한 뒤 뉴스 중계차를 파견했으나 중계장비 설치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현장 화면을 녹화한 다음 오토바이로 테이프를 수송해 6시 30분쯤 현장 화면을 방영했다. 이어 MBC, YTN, SBS의 현장 화면 보도가 각각 10~20초 간격으로 잇따랐다. 각 방송사는 중계차 4~8대를 사고현장및 병원에 대거 동원해 6시 40분쯤부터 구조 현장을 생중계했다. 위 개요란에 있는 뉴스 특보 방송 영상은 사고 직후인 7시 전후에 방송된 듯하다.

방송 3사는 사고 직후부터 이튿날인 30일 저녁까지 만 하루 동안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사고현장을 중계했다. 이 당시에 여기저기서 벌어졌던 대형사고 보도치고는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당시 축소 보도 시비에 시달린 점을 의식한 방송사들이 오명을 벗으려는 움직임이었던 모양이다. 대구 참사 당시 공보처의 불허와 뉴스 비중 미달을 이유로 연장방송을 하지 않았던 MBC는 공보처에 신고를 생략하고 연장방송을 자체 결정해 대조되었다. 주말 예능들 다수도 이 주간에는 일제히 결방하였다. MBC와 SBS는 각각 토요일(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vs.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 광주)과 일요일(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잠실)에 예정된 프로야구 중계까지 사실상 취소하였다.

사고 당일 밤 뉴스 속보 시청률은 동시간대 평균 시청률 41.0%를 훨씬 뛰어넘는 58.8%이었다. 방송시작 30분 만인 오후 6시 45분 44.3%(평균 시청률 28.7%)로 치솟은 이날 시청률은 밤10시 70.7%(평균시청률 49.3%)로 절정을 기록했다. 또 평소 시청률이 0.8%에 불과한 새벽 1시 15분에도 21.1%에 달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밤새 사고방송을 지켜봤음을 증명했다.

한편 이 사고를 세상에 처음 알린 YTN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광고방송을 일절 중단하고 사고 방송만 내보냈다. 이 당시 실종자 현황을 당시 서울시 대책본부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YTN 독자적으로 집계했고, 기자가 취재하러 잔해더미에 들어갔다 생존자를 사고 7시간 만에 구출해내는 등 여러 성과를 거두어냈다. 또 최후의 3인 중 두번째인 유지환의 생존 속보를 먼저 보도하는 등 개국한 지 석 달 만에 뉴스 채널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던 서울교대 체육관에 YTN을 틀기 위해 긴급하게 케이블TV망을 뚫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이런 개가에 신난 당시 YTN의 주인이던 연합뉴스는 매일매일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며 그 치적을 남겼다.

이번 사고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장비는 로봇카메라였다. 직경 50 mm, 길이 2백 m짜리 케이블 끝에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발견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한 이 카메라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29일 밤에만 백화점 지하 1층에 깔려 있거나 갇힌 생존자 10여 명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 구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TAP 전자산업이 제작 운용했던 이 장비가 구조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자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각 방송사들은 이 화면을 그대로 받아 생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선점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이번 방송에서는 현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항공촬영도 한몫했다. KBS는 지난 3월 새로 구입한 항공 촬영용 신형 헬기로 가장 안정된 화면을 방송할 수 있었다. 기종은 벨230으로 동체 전면에 특수카메라 웨스캄을 탑재했다. MBC 역시 자체 헬기로 항공 촬영을 했으며 SBS와 YTN은 경찰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현장의 모습을 전했다.

이 당시 재난방송은 "랜턴, 절단기, 곡괭이, 들것 등이 필요하다"는 안내방송, 추가붕괴에 따른 인근 아파트주민 대피령, 헌혈지원 등을 속보로 방송한 것이 실례며 자원봉사자, 주민들의 복구지원·구호활동을 수시 방영해 시민정신을 북돋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등 그동안의 재난방송들보다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평과 함께 발빠르고 성실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문제도 만만찮았다. "갇혀있던 생환자가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 실명케 돼 담요로 감싸고 있다."고 말하면서 화면에는 생환자 얼굴에 눈부신 조명을 비춘다거나, 구조작업을 벌이는 비좁은 공간에서는 산소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거기까지 취재진들이 들어왔다거나, 구조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마이크를 들이대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위에서 얘기한 지나친 항공취재 경쟁에 따른 헬기의 소음으로 후속 붕괴가 우려되기도 했으며 구조대원들의 목소리나 생존자들의 구조 외침이 소음에 묻혀 구조활동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소방헬기로 저건 물을 뿌려야 된다.", "저 사람은 산다, 못산다." 등 지나치게 성급한 예단도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생환자들이 어느 병원으로 이송되었는지 알려주는 필요정보는 충분치 않았다.

포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검색어를 이용해 오래된 기사 순으로 검색하면 그 당시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서 출고된 기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고현장의 시간별 상황이나 피해자 구조·치료 현황, 자원봉사 현황, 사고 원인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의 분위기를 다룬 스케치 기사, 사고 직후 PC통신에 올라온 글들도 기사화했다. 기사가 올라온 시각을 보면서 읽다 보면 당시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삼풍 보도 논조가 불쾌한 듯한 태도를 취했다. 7월 14일자 한국방송노조건설준비위원회 기관지 <방송노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7월 4일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롯데호텔 서울에서 지상파 방송 3사 사장들을 불러 "삼풍 등 여러 재해 사건사고에 대해 국민 여론이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집중된 건 언론 탓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모임 이후 각 방송사 뉴스에서 삼풍사건 미담 위주 연성보도 횟수가 늘고 5일에는 <뉴스위크> 아시아판 10일자 일부 내용을 크게 과장해 '대통령 무책임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사고 21일이 지나서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이카면 되겠제" 발언이 나왔다. 유명한 부분이므로 위의 영상을 직접 볼 것. 댓글을 보면 김영삼을 성토하는 댓글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구조 작업

이런 대형사고에서 조심스럽고 효율적이어야 할 구조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이런 사고에는 초기 구조가 중요하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고, 대규모 구조작업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허점까지 많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런 대형긴급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나 그만큼 대응 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와 경찰과 인근의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및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해병대 전우회, 심지어는 주한미군 육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고,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지휘를 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였고, 구조장비나 절단기 등 기본장비가 미리 확보하지 않아 구조가 지연되는 등 우왕좌왕하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가적 재난에 대비해 1995년 중앙 119 구조대를 창설하였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로 불을 끄고자 하였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사실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불이 났는지 확실히 알아낼 수는 없다. 눈 앞에서 불이 나고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무작정 구조대를 비난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사람들도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므로. 당시 실제로 붕괴된 A동의 북쪽 엘리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 때문에 안전을 위해 H빔을 설치하느라 활발했던 구조작업도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환경미화원 24명이 구출되었다.

화재의 열기와 소방수 때문에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 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였으며,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에서 열엿새 만에 구출된 생존자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되었다. 이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 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 덕분에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다.

소방수(水)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 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겠다고 소방수를 뿌리지는 않았다.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을 하겠다고 사람이나 장비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모든 작업은 구조 위주였고, 철거작업은 그 와중에서 행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 사항 중에는 포크레인 투입 여부도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작업하다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명석도 굴삭기로 해체하다가 발견되었다.

당시 몇몇 가지 구조 장비와 행위를 열거하자면,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 구조 시도를 여러 차례 했다. 미군이 생존자 발견에 사용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장비 스톨스(STOLS)를 하와이에서 공수했지만, 붕괴현장에선 잡다한 소음이 너무 많은 탓에 이 장비 덕분에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방송 및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 cm 정도 되는 시추공 탐지카메라를 다수 투입하였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고, 구조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다.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하였다. 붕괴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피해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당국은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시신 142구를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사망자의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쓰레기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다.(이러한 불상사는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반복되었다.)

유가족들은 격노하여 거리 시위를 하기도 했다. 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구조본부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한다는 방침을 정한 뒤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런 방침이 내려온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한다는 핑계로 봉사자들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고 백화점 안에 있는 물건들을 무단으로 절도하는 사례가 발견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시체 발굴을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까지 나온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모든 혐의가 들통나서 구속됐다.

이런 대형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인력과 장비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인력/장비 이동 등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작업에 지장이 생긴다. 자원봉사자 등 일반인은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 현대백화점도 직원 30~50명을 사고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 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 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우의 수백 장을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한편 미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고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으나, 정부에서는 자체 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들의 제의를 사양했고 위에 나와 있듯 일부 주한미군 병력과 하와이에서 음파 탐색 장비와 함께 온 소수의 미군 지원 병력이 구조를 돕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시내 병원들로 후송되었는데, 잔해에 깔리거나 늦게 발견된 시신일수록 더위 등으로 부패되어 타버리거나, 백골화가 진행되기도 하여 종전처럼 인상착의나 지문만으론 신원확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서울교대에서 실종자 가족 150명의 혈액을 채취해 당대 최첨단 기술 'DNA 감식기법'을 시도했다.

 

최후의 생존자 3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 3인 -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최명석(남, 1975년생, 사고 당시 21세, 사고 발생 11일 만에 구조)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차차 구조 열기가 식어가면서 물도 뿌리지 않아 갈증에 시달리던 중 장대비가 쏟아져 빗물을 마셔 연명할 수 있었고, 그 다음 날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던 중에 굴착기 기사가 발견하였다. 삼풍백화점에는 비정규직으로 근무하였으며, 하청 직원으로 파견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구조 이후에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원래는 군면제였지만, 스스로 자원입대했다. 이후 박승현의 고교동창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으며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GS건설에 재직 중이다. 답답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 기차를 발견하고는 이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가지고 노는 거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해준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여성도 갇혀 있어서 같이 살아나가자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25세 직원 이승연과 다른 한 명의 중년 여성은 콘크리트에 깔려 부상이 심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사고 당시의 일을 술회했는데, 매몰되어 있느라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었기에 자신의 기억은 청각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어서, 얘기도 나누고 서로서로 힘내라고 응원도 했지만 점점 그 소리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전술한 소방수 때문에 익사한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데, 그의 유언은 "물이 차올라와요...허리까지 찼어요...그쪽은 꼭 살아 나가세요..안녕."이었고 그 다음엔 '꼬르륵, 꼬르륵' 물속에서 사람이 숨이 막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소리는 평생 못 잊을 거라고..일반인과 함께 외국을 여행하는 형식의 어느 TV프로그램에 이스라엘 지역 여행자로 섭외되어 출연한 적이 있는데, 주변 지인들을 테러나 전쟁으로 여럿 잃은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 현지 청년이 ‘나는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산다’고 말하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말하더니 그날 밤 프로그램 PD에게 들려준 이야기다.(출처: 김형민, <접속 1990>)
유지환(여, 1977년생, 사고 당시 19세, 사고 발생 13일 만에 구조)
지하 1층 매장에서 근무하다가 매몰됐다. 누운 상태에서 옴싹달싹 못하는 가운데 붕괴된 콘크리트가 점점 내려와 얼굴과 맞닿은 상황까지 왔으나 극적으로 구조됐다. 같이 매몰된 동료 직원들과 대화를 하며 버텼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신 혼자만 살아있었다고 증언했다. 구조 후에 상당히 유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조된 직후의 소감으로 "구조대원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다."하며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약간 엉뚱한 말을 해서 소소하게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결혼 후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후 2021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 생존자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그날의 비극을 다시 전하기도 했다. 가명처리가 되지 않고 본명 그대로 출연을 한 드문 사례.
박승현(여, 1976년생, 사고 당시 20세, 사고 발생 17일 만에 구조)
1967년 청양 구봉광산 매몰사고에서 외부 연락이 가능했던 반면 박승현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고립 상태에서 17일간 생존했다. 사고 직후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되어 '삼풍 참사 최후의 생존자' 라는 타이틀로 산업재해 지원을 담당했으나, IMF 사태 때문에 계약직으로 전환당하면서 2000년부터 그만두었다.

 

재판과 손해배상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에 국민들은 분노를 쏟아내며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 전해인 1994년 10월 21일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그해인 1995년 4월 28일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터지는 등 근래에 유사한 대형참사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던 데다 이번 사고는 그 둘보다도 압도적으로 참담했다. 또한 앞의 두 사고와는 달리 건물 붕괴 조짐이 사전에 감지된 데다 고객들을 대피시킬 기회 또한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경영진들이 경제적 피해로 사실을 묵살하고 영업을 강행하다가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준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들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수준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난 수준 이상으로 엄청났으며,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라는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앞서 말했듯이 경영진이 붕괴 직전 백화점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백화점 건물 내에서 보수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붕괴 사실을 인지했다면 그 순간까지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들을 수급할 필요도 없었을 터. 특히나 전문가인 구조기술사 이학수가 붕괴의 가능성을 일축했기 때문에 경영진들은 그의 말을 믿고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단 그렇다고 하여 잘못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인간들이 이 사실을 이용해 옹호한다면 지탄해야 할 지점. 이 부분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을 통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대법원 1996. 8. 23. 선고 96도1231 판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업무상횡령)·업무상과실치사·업무상과실치상·수뢰후부정처사·뇌물수수·부정처사후수뢰·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뇌물공여·허위공문서작성·허위작성공문서행사][집44(2)형,821;공1996.10.1.(19),2937]
【판시사항】
[1] 건물 붕괴의 원인이 건축계획의 수립, 건축설계, 건축공사공정, 건물 완공 후의 유지관리 등에 있어서의 과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다고 보아 각 단계별 관련자들을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단한 사례

[2] 상대방인 수뢰자의 처벌 없이 뇌물공여자만 처벌하는 것이 헌법 제11조 제1항에 위배되는지 여부(소극)

[3]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소시효 기산점

[4] 공소장에 적용법조의 오기나 누락이 있는 경우, 공소장 변경을 요하는지 여부(한정 소극)

[5] 행정청의 내부방침에 위배하여 허위의 복명서를 작성한 후 대규모소매점개설신고서를 수리한 행위가 형법 제131조 제2항 소정의 '직무상 부정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건물(삼풍백화점) 붕괴의 원인이 건축계획의 수립, 건축설계, 건축공사공정, 건물 완공 후의 유지관리 등에 있어서의 과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다고 보아 각 단계별 관련자들을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단한 사례.

[2] 뇌물공여죄의 상대방인 수뢰자가 처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뇌물공여자만 처벌을 받게 된다 하여 헌법 제11조 제1항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3] 공소시효의 기산점에 관하여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52조 제1항 소정의 '범죄행위'에는 당해 범죄의 결과까지도 포함되는 취지로 해석함이 상당하므로,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소시효는 피해자들이 사상에 이른 결과가 발생함으로써 그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진행한다.

[4] 공소장에 적용법조를 기재하는 이유는 공소사실의 법률적 평가를 명확히 하여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므로, 적용법조의 기재에 오기나 누락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피고인의 방어에 실질적인 불이익을 주지 않는 한 공소제기의 효력에는 영향이 없고, 법원으로서도 공소장 변경의 절차를 거침이 없이 곧바로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법조를 적용할 수 있다.

[5] 행정청의 내부방침에 위배하여 허위의 복명서를 작성한 후 대규모소매점개설신고서를 수리한 직무위배 행위 역시 형법 제131조 제2항 소정의 '직무상 부정한 행위'에 해당되고, 관계 법령상 대규모소매점개설신고의 요건을 심사하여 수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행정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라고 한 사례.

이후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었으며,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각각 징역 10월에 추징금 3백만 원과 징역 10월에 추징금 2백만 원이 확정되었다. 전 서울특별시청 상정계장 정상기,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수익,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김재근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백만 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백만 원으로 원심형량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회장 이준의 차남)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당초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검찰은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당시 이 사고의 살인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 여부를 증언해줄 수 있었던 시설부장이 삼풍백화점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그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저것만 입증될 수 있었다면 그 설계를 승인해준 구청장까지 살인죄로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무죄추정의 원칙과 형사소송법에 의해 여러 죄로 해석될 수 있는 사고에서 특별히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행위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사기관이 직접 밝혀내지 못하면 중한 죄로 처벌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업무상 과실치사죄(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가 적용되었다. 판단 기준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있다지만, 정말로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있다지만, 정말로 사람이 죽지야 않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인식있는 과실, 즉 과실범이다.

거기에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었으므로 경합범 가중(1/2배 가중)하면 사실 이준이 선고받은 징역 7년 6개월은 원칙하에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다. 이후 그는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고, 그 해 10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편 삼풍백화점의 사장 이한상은 그보다 앞선 2002년 10월에 출소했다. 2000년 당시 이준의 부인, 그러니까 이한상의 어머니가 대한민국 법무부에다 가석방을 탄원했지만, 당연히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법률의 한계로 인해 이준 일가에 내려진 형벌은 솜방망이에 가까웠지만 벌금은 매우 강했는데,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이준 일가는 전재산을 추징금 + α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하고 손해배상 처리를 서울특별시청에 일임했다. 징역의 기간이나 벌금의 액수는 형벌이라 법에 써 있는 만큼만 부과해야 하지만 손해배상금은 민사재판의 영역이라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끼쳤음'이란 사실만 인정되면 법관의 판단 하에 일정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부과할 수 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손해배상액은 재벌인 이씨 일가 전재산으로도 부족했으므로 결국 서울특별시청에서 모자란 금액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 1인당 3억 8천만 원씩 지급되었으며, 배상금 총액은 3317억 원에 달했다.

그래도 금융권 부채를 탕감하고 난 후 추정되는 삼풍그룹의 나머지 자산이 3천억 원 정도는 되어서 보상액의 거의 대부분을 책임진 셈이기에 무임승차로 나 몰라라 한 것까지는 아니었고, 삼풍의 부실공사를 눈 감아준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음은 사실이기에 서울특별시청 입장에서는 부족분을 책임지는 게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부가 부담하는 그 결손액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을 물린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돼버렸다.

붕괴사고가 발생할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자치제가 아닌 관선 체제였기에 서초구청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먹었으면 서초구청장만의 책임으로 한정짓지 않고 정부와 서울시의 직접적인 책임까지도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중앙 정부가 직접 서울시장으로 앉혔다. 관선제 시절의 전임 서울특별시장과 서초구청장이 벌인 실책 때문에 민선으로 선출된 후임 서울특별시장과 서초구청장이 고생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서초구청장이었던 조남호는 유족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가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한 재산 목록 중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여미지 식물원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에 소재한 관광 명소를 서울특별시시설관리공단에서 경영하는 괴상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5년 부국개발에 인수됐으나 2007~2017년까지 정리해고 문제로 노사갈등이 빚어졌다. 게다가 학교법인 숭의학원 역시 관선이사 체제를 거쳐 1999년 영안모자에 매각됐다.

이 사고 이후로 1996년 대기업이던 삼풍건설산업은 흑역사를 남긴 뒤 사실상 공중분해됐으며, 사고와 그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중소기업 1100여 곳이 부도 처리되어,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삼풍에서 일했던 직원, 관련 중소기업 직원 등도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길바닥에 내몰려야 했다. 특히 삼풍건설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일반 직원은 물론 고위직들마저도 이 사고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잃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 자체가 국민들에게 악의 축으로 찍히는 바람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닥쳐 온 1997년 외환 위기와 함께 삼중고를 겪으며 다른 곳에 가서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도 못살게 만든 셈이 된 것이다.

 

국가배상 부정

대법원 1999. 12. 21. 선고 98다29797 판결
【판시사항】
[1] 승소판결에 대한 상소의 허용 여부(소극)

[2] 공무원의 직무상 의무 위반으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배상책임을 지는 경우의 직무상 의무의 내용 및 상당인과관계 유무의 판단 기준

[3] 설계변경 승인이 설계도서 등과 다른 위법 시공을 한 후 사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위법한지 여부(소극)

[4] 허가관청이 건축허가사항대로 시공된 건축물의 준공을 거부할 수 있는지 여부(소극)

[5]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상소는 자기에게 불이익한 재판에 대하여 유리하게 취소·변경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승소판결에 대한 불복상소는 허용할 수 없다.

[2] 공무원에게 부과된 직무상 의무의 내용이 단순히 공공일반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행정기관의 내부의 질서를 규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또는 부수적으로 사회구성원 개인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정된 것인 이상, 공무원이 그와 같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함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하여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공무원이 소속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배상책임을 지는 것이고, 이 때 상당인과관계의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결과 발생의 개연성은 물론 직무상의 의무를 부과하는 행동규범의 목적이나 가해행위의 태양 및 피해의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3] 설계도서 등과 다른 위법 시공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건축이 건축관계 실체법규에 저촉되지 않는 경우라면 그에 맞추어 설계변경허가를 받음으로써 설계도서와 시공상태가 불일치하는 위법상태를 시정할 수 있으므로 그와 같은 설계변경허가신청이 있을 경우 행정청으로서는 위법 시공 후의 사후 신청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거부할 수 없으므로, 설계변경 승인이 사후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

[4] 준공검사는 건축허가를 받아 건축한 건물이 건축허가사항대로 건축행정목적에 적합한가의 여부를 확인하고 준공검사필증을 교부하여 주는 것이므로 허가관청으로서는 건축허가사항대로 시공되었다면 준공을 거부할 수 없다.

[5]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다고 한 사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1999년 12월 21일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국가배상이 부정되었다.

인과관계가 부정된 이유는 부실시공, 설계, 무계획적 건축에 대해 건축법령상 서초구가 관리, 감독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부분이 법령상 거의 없기 때문에 직무의무위반으로 인해 붕괴사고가 발생할 개연성 자체가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공무원의 직무범위 관련해서 사경제작용 제외하고 다 적용되는 광의설을 취하는 국가배상 청구소송이 저런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해서 국가배상을 부정했을 리가 없다. 사실 인과관계가 당연히 있지만 이 사고에서 국가배상을 인정하면 물어줘야 할 것이 너무 엄청나서 부정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담으로, 고승덕이 상고인 소송대리변호사로 뛰었던 사건이기도 하다.(상고인-서울특별시 서초구)

 

사고의 여파

문민정부 출범 이후의 대형 악재들이 늘 그렇듯 대부분의 부실공사와 졸속 관리는 이전부터 축적 되었던 군부독재 정권 시대의 무리한 실적주의, 무분별한 개발, 관료와 기업의 부정부패, 관료들의 무사안일함 등이 어우러져서 터진 사고이다. 즉 그동안 독재의 억압으로 감춰져 있던 압축성장의 폐해들이 민주화가 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당시 야당 대변인이었던 박지원이 경복궁이 무너지면 흥선대원군 책임이냐는 발언으로 일침을 놓았고, 원인은 과거 군부독재 정권이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 정부의 관리 감독의 책임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삼풍백화점도 건축 허가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받았고, 공사와 개장은 노태우 정권 시절에 했지만, 관리감독 책임이 당시 문민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방자치제 시행 이전으로 임명직 시장이 행정을 도맡아서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으로 주거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대형 건축물이 졸속으로 건설되어 곧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예상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이 사건의 충격과 여파로 후술하겠지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여 특정시기에 건축된 건물 전체에 대한 안전검사를 실시하게 된다.

김영삼 정부는 붕괴 장소를 사상 최초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으며, 구조와 사고 수습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 동안 은폐된 부실공사와 잇따른 대형참사를 거치면서 그 동안 미비했던 체계적인 사고대응체계의 수립과 훈련된 전문구조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소방본부가 단순 화재진압뿐 아니라 각종 안전사고에 대한 대응까지 맡도록 하였고, 1995년에는 소방본부에 119구조단을 신설하여 유사시에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전문구조인력 양성에 힘썼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국내 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고층 건물의 설계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설계부터 확실하게 하자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전후로 터진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함께 20세기 말 가장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안전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 사고라 할 수 있다. 대중이 부실공사를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짓'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짓임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음은 이 사고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이다. 부실공사의 근본 원인이 공사비 착복과 해당 공무원들의 비리라는 점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나름대로 비리척결에 한 몫 했다.

사고 발생 이후 한국의 건축 기술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서 해외 공사 수주율이 뚝 떨어졌지만 그 뒤 공짜나 다름없이 지어주면서 위기를 넘긴 다음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외국의 공대생 혹은 건축과 학생들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자랑하면 어김없이 그들 입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떡밥으로 튀어 나와 데꿀멍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서 외국에서 잊힐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것이, 이 사건은 21세기에서도 심심하면 최악의 참사를 꼽을 때 순위 권 안에 들어가는 거대한 참사 사건이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즉, 앞으로도 심심하면 관련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방영될 만큼 비중이 매우 큰 사건이다. 이러한 두 사건 때문에 나라 망신을 제대로 당한 데다가 애꿎은 다른 건설 회사까지 피해를 보는 셈이다.

 

안전 평가 실시

붕괴 사고 이후 삼풍이 지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충격과 공포였다.


전체 고층 건물의 1/7(14.3%)은 개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전체 건물의 80%은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었다.
대한민국 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당산철교를 비롯한 여러 구조물이 철거된 다음 다시 지어졌다. 특히 당산철교의 경우 제2의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엉망진창 상황이라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최일구의 기자 시절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이걸 고발해낸 것. 그러나 결국 이러한 대형 참사에 대한 대책과 노력으로 문민정부 후반부부터는 삼풍, 성수대교급의 대형참사는 사라졌다.

 

사회에 미친 영향

사고 이후 일반 국민들과 재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백화점 및 대형건물 기피현상'이 만연해져 백화점 등 유통업체 매출이 줄어드는가 하면, 화투판에선 풍 3개면 패도 못 돌리고 죽는 '삼풍 고스톱'이 유행했다. 패를 먼저 뗀 사람은 기초공사를 잘못 했다고 2배, 패를 돌린 1등은 부실 공사를 했다고 2배씩 내고 5명 이상이 참가하는 게임이면 그 둘은 다음 게임에서 아예 빠졌다고. 거기에 1997년 외환 위기까지 겹쳐 백화점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2000년 하반기 이후 정도로 추정된다.

 

건축계에 미친 영향

삼풍백화점은 이른바 무량판 구조(mushroom construction)로 지었다. 이것은 기둥과 바닥 사이에 보가 없이 바닥이 기둥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실내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하중과 바닥 구조체의 무게가 기둥으로 직접 전달되는 방식이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고 원인은 무량판 구조 그 자체가 아니라 각종 착복과 비리를 위한 무리한 용도 변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량판 구조 자체는 제대로만 설계한다면 다른 공법보다 훨씬 안전하기에 해외에서는 아직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2005년에 제작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삼풍 백화점, 예고된 붕괴'에 출연했던 미국 구조 전문가는 "오히려 삼풍백화점 건물이 무량판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무리한 설계변경에다 설계 하중의 4배가 넘는 무게를 올려놓는 등의 각종 뻘짓에도 불구하고 5년이나 넘게 버틸 수가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실제 국내 건설업계에서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의 무량판 구조는 일종의 금기가 되면서 건축주나 설계자가 꺼리게 되었다. 상술했듯 삼풍의 부실시공은 건축의 ㄱ자도 모르는 이준 회장이 멋대로 설계에 간섭하여 발생한 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미친놈 하나가 어설프게 대충 구현하고 사고친 것 때문에 멀쩡한 건축공법까지 억울하게 몰매를 맞은 격이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시간이 흐른 뒤로는 다시 절찬리에 운용중이며, 기둥에 주두나 지판은 물론 철근 정착까지 해당 사항이 구조기준에 명시되어 있고 2방향 슬래브 전단강도 산출 공식도 도입되어 뚫림전단 파괴를 방지하고 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모든 건축물은 부재를 탄성상태로 보는 허용응력 설계법(WSD)으로 설계했으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이후 콘크리트 건축물은 극한강도 설계법이나 한계상태 설계법으로 설계한다. 삼풍백화점이 부재의 역학적 해석방식까지 바꿔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극한강도 설계법(USD)과 한계상태 설계법(LSD)이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사고 당시 기준으로도 40~50여 년 전부터였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1970~80년대 이미 구조기준에 해당 설계법을 도입한 상태였다. 미국의 경우 1956년에 강도설계법을 부록 기재, 1963년에 허용응력 설계법과 같이 본문에 기재, 1971년 허용응력 설계법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본문에 강도설계법을 기재하였다. 부록 기재부터 치면 까마득하게 늦게 도입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콘크리트 구조기준은 2000년 전후로 그간 논의를 거쳐 극한강도 설계법을 전면 도입하고, 균열이나 처짐 등에 한정하여 허용응력 설계법을 운용하고 있다. 한계상태 설계법의 경우 도로교 설계기준에 도입되었는데 2015년 개정 기준으로 그 전에는 재량적으로 도입하였다가 그 후부터 기준에 전면도입 되었다. 한계상태 설계법은 차치하더라도, 극한강도 설계법 도입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사고 발생 후 해외의 건축물 발파 해체 공법 종사자들이 다 몰려와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을 보고 발파 공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타깝게도 안전해진 것은 오직 건축공법뿐이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는 안전불감증으로 시공불량에 의한 대형 안전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담당자들과 관련 기관들의 부실하고 허술한 대처가 그 사고의 피해를 키우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대륙 건너 홍콩에서도 동철선, 서철선 지하 홍함역에 똑같이 부실공사를 했다가 내부고발자에 의해 걸렸다.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

상기한 바처럼 당시까지는 이런 대규모 재난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사태가 발생하자, 경찰, 소방서, 군,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달려오긴 했으나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구조활동에 우왕좌왕했다. 심지어 주한미군이 도우러 와서 지휘본부가 어디냐고 물어도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구조활동은 말그대로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다가 며칠 후에서야 청와대가 교통정리를 하여 소방본부 중심으로 현장지휘본부를 꾸렸다.

그 당시 달려온 소방대원들은 열심히 구조활동을 펼쳤으나, 이런 대규모 재난사태에 대한 대처메뉴얼이나 구조에 관한 의학지식이 없어서, 구조자들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현장에서 죽어가기도 했다.

사실 이런 재난재해 대응 매뉴얼 부재에 대한 지적은 바로 전 해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시부터 지적된 것이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조사한 서울지검은 이에 모든 조사 내용과 대응 매뉴얼을 백서 형식으로 발간하였는데, 그 발간 날짜는 1995년 6월 30일이었다고 한다. 삼풍은 백서 발간 불과 하루 전에 무너졌다. 물론 백서가 나왔다고 해서 현장에 바로 반영되진 않았겠지만...

경상자들을 우선 근처 병원 응급실로 바로 보내는 바람에, 막상 중상자들을 치료하려면 먼 병원 응급실로 보내야 했으나 소방차, 구급차, 방송국 차량 등이 섞인 교통대란 속에서 차량 운행이 어려웠다. 결국 중상자를 장시간에 걸쳐 구급차로 이송하거나 구조대원들이 직접 업고 이동해야만 했고 그 결과 이송 중 사망하거나 구급차 또는 근처 병원에서 대기 중에 사망하곤 하였다. 또한 붕괴된 잔해에 깔린 구조자를 위해 무턱대고 잔해를 치워보니 쇼크로 인해 요구조자들이 사망하였고, 이후 '잔해를 막 치우면 매몰자들이 쇼크로 사망한다'는 내용이 일선 소방관들에게 전해져 구조방법을 바꿔보라는 방침이 전파되었지만 이번에는 잔해를 살짝 들어올리고 요구조자들을 끌어당기는 식으로 구조방법을 바꿨다가 잔해에 깔린 요구조자들의 다리나, 팔 부분이 그 과정에서 절단당하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그리고 끝없이 느린 이송 도중에 과다출혈로 사망... 하지만 이 사태를 계기로 중앙119구조본부가 창설되어 국가적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고, 이때 구조활동에서 얻은 노하우도 이후의 크고 작은 구조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사람들은 소방서라고 하면 화재 시 불 꺼주는 곳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사태 이후로는 유압식/전동식 장비들이 적극 활용되면서 사람을 구조해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생겼다. 이후 이 노하우들을 가진 119구조본부는 해외의 대규모 재난(지진 등) 발생 시 현장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등, 국제적 구조활동도 돕는다.

또한 당시 119구급대로 활동하는 구급으로 채용된 소방공무원이 있었지만 간호조무사나 군 의무병 전역자를 특별채용 하는 등 소방공무원의 의학적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였다. 제대로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도 없었고 구출이후 사진을 보면 경추고정대나 척추보호장비 없이 단순히 사람이 직접 들어 옮기거나 들것에만 옮겨지고 있는 사진만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의학계에서 응급의료체계가 대두되면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의 응급의료기금을 통해 119구급대에도 제대로 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 자동심장충격기 등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었다.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자 간호사, 응급구조사도 채용하게 되었다.

 

의학에 미친 영향

아이러니하게도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항상성 보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저런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만큼 극심한 기근을 겪는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한지라(아프리카 내전국들처럼)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어렵고, 반대로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쉬운 국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지라 저런 극심한 기아가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관찰이 어려웠는데 이 사건이 발생함으로 인해 기존에 보기 힘들었던 사례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아이러니와 맥락이 닿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 11일 만에 발견된 최명석은 구조 후 갑작스런 과다한 영양섭취로 인해서 간에 손상을 입고 자신보다 나중에 구조된 유지환, 박승현보다 더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전에 지하갱도 붕괴나 기타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해서 장기간 기아 상태의 환자가 갑작스런 영양소 과다 섭취에 대한 신체 반응에 대한 국내의 연구나 임상이 전무해서 벌어진 일화.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먹을 걸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본 상식이었다. 단지 이게 오직 경험에 근거한 지식이었던 관계로 과학적으로 왜 그런건지는 검증된 적이 없다 보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압좌 증후군(Crush syndrome)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무거운 잔해에 짓눌린 동안 조직이 괴사해 독성물질을 품었다가 구조된 후 그것이 혈액을 타고 온몸에 퍼짐으로써 발생하는 증후군이다.

또한 이 사고를 계기로 대형 재난 시 부상자들의 치료를 담당하는 응급 의료체계의 개편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붕괴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은 경상자와 중상자의 분류없이 사고 현장과 가까운 대형 종합병원인 강남성모병원(현재의 서울성모병원)과 영동세브란스병원(현재의 강남세브란스병원)및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했다.
하지만 사고의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예상보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린 탓에 이 세 병원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 병원들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병원이긴 했지만, 한꺼번에 부상자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상자 응급처치, 수술이 늦어지거나 일단 세 병원으로 이송했다가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체계의 중요성을 두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1995년에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았다. 1996년부터 응급의학전문의가 배출되었다.

 

사고 이후

1995년 9월에 A동의 잔해가 먼저 철거되었으며, B동은 3년 넘게 남아 있다가 결국 안전 진단에서 위험성이 대두되자 입점업체들을 내보냈고, 1998년 10월경에 철거가 시작된 뒤 3개월 후인 1999년 1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삼풍백화점 인근의 서초동은 강남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 중 한 곳이라 고급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긴 했지만, 워낙 악명 높았던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던 곳인 만큼 매각이 잘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6년 11월 미원그룹 계열 미원건설(현 동서건설)이 서울특별시청의 부지 매각 공개입찰에서 2만 2700여 ㎡(6870여 평)의 해당 부지를 2052억 4300만 원에 낙찰받아 1999년 8월에 낙찰가 및 지연금을 모두 완납하여 최종 인수했다. 이후 시공사로 대림산업을 선정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04년에 아크로비스타라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에 지으려 했으나 참사가 일어난 곳이라는 걸 알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긴 하나, 그 장소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엉뚱하게도 사고가 일어났던 위치가 아닌 양재시민의 숲이라 그런 것이다. 위령비가 사고 현장에 세워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먼저 지어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위령비에 밀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 1999년 10월에는 삼풍 사고 때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40대 남성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 위령비 옆에 있는 나무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위령비 근처에는 자그마한 정자도 하나 있는데, 주로 인근 aT센터에 있는 서울 코믹월드 때 쉬는 장소로 자주 쓰인다. 이 위령탑에 관련된 충격적인 일이 하나 더 있는데 추모를 위해서 혹은 피해자 가족들 등이 놓고 가는 꽃을 가지고 가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 것인지 유족측이 경고문을 걸어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서초동에서도 요지 중의 요지인 삼풍백화점 터가 아크로비스타의 착공 전까지 5년이 훨씬 넘도록 어떠한 건물도 들어섬이 없이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된 것은 단순히 참사의 이유로 매각을 꺼린 상황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것이 이미 사고 1년 뒤에 경매에서 대상그룹이 낙찰을 받았기 때문으로, 대상그룹이 부지 경매에서 낙찰받고 금액납부를 3년씩이나 지연해서 공사가 늦춰진 것이다. 대상그룹이 미원 등으로 식품 부문으로 유명한 재벌이긴 해도 당시 2천억 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기업 규모나 시가총액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던 데다 1997년 외환 위기 등의 경제적 위기 상황까지 감안하면, 낙찰가 납부를 위한 자금 마련이 내부적으로 쉽지 않았던 듯하다.

이 일이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16년 후인 2011년 7월 5일,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가 생기자 즉시 손님과 상인들이 철수하고 대책회의를 열며 급히 문제 분석에 들어갔다. 근데 건물주 측은 빠른 움직임을 보인 데 반해 입주 상인들과 어느 대형 입점업체는 돈 한 푼이라도 벌겠답시고 철수를 곧바로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사고 구조과정에서 지하 바닥이 드러나기 전까지 생존자가 간간이 구조되어 거의 보름간 뉴스는 삼풍 구조 소식이 차지했다. 그런지 몰라도 상당수 다른 사고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 반면에 이 삼풍백화점 사고만큼은 아직도 상당수가 기억하고 가끔씩 얘기하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해 몸서리치곤 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최악의 참사다. 그래서 이 사고에 대해 적힌 현대사 책도 있다.

실제 삼풍 참사가 발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기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영업 중 정전 사고가 났는데, 쇼핑하던 고객들이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거나 기둥을 붙잡는 등 건물의 진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불안감을 표출하는 반응을 보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2011년 발생한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에서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불안감을 표출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표적 역대급 참사임에도 이런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금은 교육 현장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말도 있다. 그나마 대학 공학윤리 과목에서는 필수 소재가 되었고, 외국 교재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준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7년간 교도소에서 살았고, 재산은 압류당하고 지인들도 관계를 끊었으며, 감옥에서 신장병에 걸려서 출소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에는 출소 6개월 만에 쓸쓸하게 골로 갔다. 당시 가족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장례식장에는 놀랍게도 큰며느리가 왔다고 한다. 불쌍하게도 이 사람은 본인도 피해자인데, 사건 후 장본인인 시아버지 이준 대신에 사과했다고 한다. 여론은 이 사람도 피해자였던지라 동정했다고 한다.

당시 구조에 힘썼던 구조 대원들이 20주기를 계기로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사건 이후 사망자가 300명 이상 발생하는 사고는 19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나 2014년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법조인들 중 사법연수원 26기 출신들은 하마터면 이 사고에 휘말릴 뻔 했다. 당시 사법연수원은 서초구 서초동의 서울법원종합청사 3별관에 위치해 있었다. 여긴 삼풍백화점의 바로 길 건너편이다. 사고 당시 연수생들은 예술의 전당에서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사법연수원으로 돌아와 보니 백화점이 폭삭 무너진 걸 발견한 것. 당시 연수생들은 연수원과 가까운 삼풍백화점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이 공연 관람이 아니었다면 개인적으로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사고 이후 처음엔 삼풍주유소에 설치했던 사고수습 지휘본부를 연수원 건물로 이전했고, 연수생들도 구조대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나눠주고 헌혈에 참여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행했다. 참고로 26기 출신 유명인사들로는 천종호, 송영길, 이미선, 도진기 등이 있다.

이후 삼풍백화점이 가지고 있던 고급스럽고 화려한 이미지는 한화갤러리아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과 (주)신세계의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으로 옮겨갔다.

대한민국 토목공학과 건축학과 종사자들 에게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그야말로 한국에서 토목과 건축이라는 학문과 건축업이라는 산업 자체를 송두리째 뽑아버릴 뻔한 최악의 흑역사이다. 현재도 많은 토목과나 건축과에서 주요 사고사례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언급될 정도로 그 여파는 지금도 고스란히 전한다.

 

남아있는 흔적들

사고 당시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던 삼풍주유소는 2011년에 문을 닫았다.

B동에 입주했던 조흥은행 지점은 붕괴사고 이후에 백화점 밖으로 빼고 현재까지도 영업 중이다. 옛 삼풍백화점 뒤쪽(삼풍아파트 후문)에 있는 신한은행 삼풍지점이 삼풍백화점에 있던 지점의 후신이다.

백화점 뒷편의 삼풍아파트의 단지 내 안내도에는 2011년까지 삼풍백화점이 표시되었으나 안내도가 교체되어 사라졌다. 삼풍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 반포미도아파트 1차, 2차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 마크가 새겨져 있는 쓰레기통이 존재한다. 쓰레기통은 1994년, 그러니까 붕괴사고 1년 전에 삼풍백화점 측에서 홍보용으로 아파트에 설치한 것이다.

V-World 의 과거 항공사진으로 지금도 삼풍백화점을 볼 수 있다. 1989년 항공사진에는 A, B동 모두 볼 수 있지만, 붕괴사고 이후인 1996년 항공사진에는 A동은 공터가 되고 B동만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89년에는 자세히 보면 A동의 냉각탑이 우면로 쪽으로 옮기기 전 삼풍아파트 쪽으로 되어 있고, B동의 지붕이 완성되지 않아서 완공 전의 사진이다.

 

괴담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이에 관련된 괴담들이 도시전설로 은근히 번졌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지 11일째 되던 1995년 7월 10일 그날은 유난히도 천둥번개가 심하게 치고 폭우가 쏟아졌는데 공교롭게도 백화점 엘리베이터 타워에 낙뢰가 떨어지는 장면이 MBC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이를 두고 억울하게 숨진 피해자의 원한이 담기지 않았냐는 말이 있다.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주상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의 지하에서 괴음성이나 귀신 목격담에 대한 말도 있다. 그 탓에 초기에 경비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요새는 좀 잠잠해진 모양이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자리 바로 위에 건설된 주상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 A동의 지하상가(#사진)에서 오래 살아본 주민에 따르면 지하에서 한기를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교회나 절에서 엑소시스트가 정기적으로 온다고 하며, 특히 영안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같이 원한이 가득한 귀신들이 잔뜩 보인다고 했다. 이 곳 주민들은 물론 지하상가 점주들에게 삼풍백화점 관련 얘기만 꺼내도 진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곳 지하상가에 입점한 점주들도 심야 영업을 꺼려서 늦은 밤에 상가 대부분이 영업을 종료한다고 한다. 심야 영업을 떠나 늦은 밤에 저러한 장소에 있다는 게 오싹하다는 듯하다.

당시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에서 전경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새벽에 방패 옆에서 졸고 있는데, 드르륵 소리에 눈을 떠보니 웬 아주머니가 (사고 현장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거예요. '이런 곳에서 웬 유모차?'라고 다시 눈을 붙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지하 슈퍼 아주머니들이 카트를 끌고 다녔던 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렇게 대형사고가 발생한 곳은 경찰청 또는 검찰청이나 감사원, 국세청 같이 권력이 강한 국가 기관을 세워서 그 기를 눌러앉혀야 한다는 무속인들의 말이 있다.

어머니와 아이가 백화점에 갔는데 아이가 너무 울어서 백화점에서 나와 아이에게 왜 그렇게 우냐고 다그치니 아이가 '엄마는 검은 옷 입은 사람들 못 봤어?' 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제법 유명한 괴담이다. 그리고 이야기 마지막에 '그 백화점은 삼풍백화점이었다.' 하는 말이 붙는다. 아이가 '검은 옷 입은 사람'을 보고 어머니한테 떼를 써 백화점을 나오는데 나오자마자(내지는 뉴스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버전도 있다. 이 '검은 옷 입은 사람'은 저승사자란 말도 있고 위기를 알아채고 경고를 준 조상님이었다는 말도 있다.

사고 후 삼풍백화점에서 유출된 쇼핑카트를 옛날 근무자가 주워 서류 운반용으로 어떤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회사원들 사이에서는 저 카트가 있는 창고에서 잠을 자면 가위가 눌린다거나 악몽을 꾼다고 한다. 당시 사무실에 근무한 지 얼마 안 된 필자가 이 쇼핑카트가 있는 서고에서 점심시간 낮잠을 잤다가 30분 동안 악몽을 꿨다는 도시전설 및 경험담이 아햏햏 시절 디시인사이드에 올라온 적 있다.

 

가까운 지하철 역에서 삼풍백화점 마크가 그려진 쇼핑백을 든 아주머니가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괴담이 아닌 오히려 매우 있을 법한 일이다. 알뜰한 아주머니들은 보통 백화점 쇼핑백들을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고서 이웃 아주머니나 누군가에게 전해줄 음식이나 물건 따위를 담는 용도로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삼풍백화점 쇼핑백 또한 실제 인근 주민들이 사고 후에도 이런 용도로 많이 사용했을 것이고 실제로 붕괴사고가 난 지 10년이 넘은 후에도 이런 경로를 통해 삼풍백화점 쇼핑백을 입수했던 어느 블로거가 사진으로 올린 적도 몇 개 있다. 거기에 교대역은 삼풍백화점 인근이기도 하지만 삼풍백화점을 애용하던 주변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많이들 이용하는 지하철 역이기에 이런 풍경은 어찌 보면 귀신이라기 보다는 그냥 있을 법한 일이 괴담으로 와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환각을 겪었을 수도 있다. 한국인의 경우 정서상 사건/사고와 관련된 물건이나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사용하거나 만지는 것을 불길하게 생각하여 꺼린다. 만약 누군가가 물건을 쥐어주면서 사건 사고에 관련이 되었다던가 누가 생전에 쓰던거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사고와 관련된 물건을 쓰는 것을 불길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물건을 보면서 사건사고가 일어났던 것이 떠오르고 이것이 뇌리에 남아 환각을 겪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YTN의 취재로 당시 무너진 백화점 내부 또는 그 주변의 CCTV 사진으로 보이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 사고 현장에서 옷들을 훔쳐 유유히 달아나는 어느 여성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고 지금도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상당히 오래된 보도 사진이지만 대형 참사가 난 뒤 잔해를 뒤지며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는 점에서 소름끼친다는 반응이 많으며 짤방으로도 가끔 쓰인다. 1990년대 중반임에도 CCTV 영상 화질이 너무 좋다는 점 때문에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 1995년 당시 CCTV의 화질로 사람의 이목구비와 표정, 들고 있는 물건까지 확실히 나오기는 어렵다. 인터넷에 떠도는 카더라에 의하면 이 사람은 40대의 삼풍백화점 직원이고 추가 붕괴로 인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정확히 알려진 사실은 없다.

검사 결과 건물들 중 2%만이 안전한 상태라는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전국 각지의 건물들이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거나 재건축에 들어가는 괴사태가 있었다. 이때 대기업이나 정부 건물들은 확실히 안전하게 재건축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건물들은 돈이 없어서 개보수를 하지 못해 여전히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있다.

2010년 11월 3일에는 아직도 삼풍스러운 백화점이 지어지고 있다는 괴담이 돌았으나 사실관계에 맞지 않아서 괴담으로 끝났다. 다시는 삼풍백화점 같은 건물을 지으려는 시도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것이나 국내에서도 실제로 제2의 삼풍백화점을 지으려던 시도가 발각되었다. 결국 2013년 해외에서 삼풍을 넘어선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가 터지면서 제2의 삼풍 사태가 터졌다.

 

출처 : 나무위키(https://namu.wiki/w/%EC%82%BC%ED%92%8D%EB%B0%B1%ED%99%94%EC%A0%90%20%EB%B6%95%EA%B4%B4%20%EC%82%AC%EA%B3%A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