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사건사고 -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개요
1985년 8월 12일 오후 6시 57분 경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소속 보잉 747(기체 등록번호 JA8119) 여객기가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 현 부근의 타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 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인원 524명 가운데 520명이 숨진 참사이다.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이며 항공기 탑승객 총 사망 순위로는 세계 2위, 아시아 1위의 참사이다.
사고 이후 123편은 당연히 영구결번되었으며 현재 하네다-오사카 노선에서 121편 다음은 125편이다.
사고기
사고기의 기종은 보잉 747SR-46이다. 보잉 747SR은 보잉 747-100을 일본 국내선용으로 커스터마이징하여 제작된 버전으로,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 두 항공사에 의해 운용된 기종이다.
일본 국내선의 막대한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일본항공이 보잉에 발주하여 제작된 사양으로, 3시간 미만의 단거리 비행에 알맞게 연료 탑재량을 줄여, 이륙 최대 중량을 줄이고, 수송량을 극대화시키고, 잦은 이착륙 환경에 맞게 일부 구조와 랜딩 기어를 보강한 기종이다. 사고기의 경우 정원이 총 528명이었는데, 원판인 보잉 747-100의 일반적인 3클래스 좌석 배열 정원이 366명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기(기체 등록번호 JA8119)는 1974년 1월에 생산되었으며, 1978년 일본항공 115편 불시착 사고 때 테일 스트라이크로 기체 후미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사고 후 수리가 부실하게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결국 참사의 원인이 되었다.
승무원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 (高濱 雅己, 49세, 운항부분 지도 교관, 총 비행시간 12,423시간 41분)
부기장 : 사사키 유타카 (佐々木 祐, 39세, 기장 승격 훈련생, 총 비행시간 3,963시간 34분)
항공기관사 : 후쿠다 히로시 (福田 博, 46세, 엔지니어 부분 교관, 총 비행시간 9,831시간 3분)
수석사무장 : 하타노 쥰 (波多野 純, 39세, 총 비행시간 10,225시간)
당시 이 비행기는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겸하였기에 사사키 유타카(佐々木佑) 부기장은 기장석에서 비행기 조종과 승무원에게 지시를 하고,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은 부기장석에서 부기장의 기장 승격 훈련을 지도하며 관제탑과의 교신을 주로 맡았다. 때문에 아래의 교신 내용을 들어보면 기장이 교신을 담당하고, 엔진 출력 조종 등 원래 기장의 역할은 기장이 직접 하지 않고 부기장을 독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 경과
이륙
사고 당일은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며 일본 내 2대 명절로 불리는 오봉(お盆) 전날로, 탑승객은 샐러리맨들과 귀향객, 여행객들이었다. 또한 기체는 삿포로 1 왕복, 후쿠오카 1 왕복 비행을 한 후 오사카(이타미)까지 왕복하여 하네다로 돌아온 다음 그날의 비행을 마칠 예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항공기관사는 오랜 시간 동안 조종실에 탑승하고 있었다(도쿄(하네다)~후쿠오카 왕복편으로 탑승). 부기장은 다른 비행기에서 기장 승격 시험을 마친 다음 123편을 타게 됐고, 기장은 그 날 첫 비행이었다.
사고 당시의 123편 비행기 티켓. 이 티켓은 생존자인 카와카미 케이코의 티켓이다.
사고기는 18시 정각에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56분의 비행을 거쳐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이륙 예정 시간보다 4분 늦은 18시 04분에 이륙했으며, 이후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기체의 모든 계기는 정상 작동했다. 연료는 약 3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양이 탑재되었다.
사고 발생
당일 123편은 도쿄 국제공항을 출발. 예정대로 비행을 하고 있었으나 이륙한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에 고도 24000ft(7315.2m) 상공에 도달한 직후 큰 폭발음이 들리고 후쿠다 히로시(福田 博) 항공기관사(FE)의 계기판엔 R5(오른쪽 5번째)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된다. FE는 이 도어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에게 알렸으며 경고 50초 후에 조종사는 긴급 사태(EMERGENCY)인 '스쿼크 7700'을 발신.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면서 도쿄 국제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때 벌크헤드가 날아가고 수직 꼬리날개가 찢겨 날아가면서,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새어나가 조종 불능에 빠진다. 물론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다중 계통으로 구성하며 747의 유압계통 역시 4개의 채널로 구성하지만, 123편은 불행하게도 4개 모두가 찢겨나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보잉 747은 꼬리날개 바로 밑에 모든 유압장치 파이프가 지나가는 구조이기에 꼬리날개가 파괴되면서 유압장치 파이프가 날아갔기 때문이다.
조종 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4개의 엔진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한 번 선회를 시도하여 9000 ft(2743.2m)를 내려와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기체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며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 불능을 보고한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이는 더치 롤과, 조종이 불가능한 기체의 기수가 위로 들리게 되면 고도는 상승하고 속력은 감소 / 어느 정도 속력이 감소하면 기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고도는 다시 하강, 속력은 상승/ 속력이 붙은 기체의 기수는 다시 위로 향하는 휴고이드 운동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승객들이 남긴 유서의 필체가 상당히 휘갈겨진 상태로 적혀있다. 더불어 엔진 출력차와 플랩을 이용한 조향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서 기체는 항로를 완전히 이탈하고 만다.
실속 상태만 간신히 막으며 계속해서 기수가 오르내리는 가운데 방향 조절은 완전히 불가능해지고, 비행기는 항로를 이탈해 하네다와 요코타의 정반대인 후지산으로 날아간다. 최초 이상 발생 약 30분 뒤 가능한 한 최대의 수단들을 이용한 승무원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체는 양력을 완전히 잃고 보잉747의 뱅크각 한계를 한참넘어서 오른쪽으로 쏠려 급강하하며 6시 56분경,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공중 분해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 기체 후부가 분리됐다. 그리고 가까스로 잠시 상승했으나, 조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마지막으로 123편의 메인동체부는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최종 추락, 충돌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동체부의 탑승자들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 기내의 상황
18시 24분경, 기내에선 "펑" 하는 충격음이 들린 직후 각 좌석에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으며 "현재 긴급 하강(비상 강하)중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프리 레코디드 어나운스가 일본어와 영어로 방송되었다.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산소 마스크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담배를 끄는 등의 비상 대책을 행했고 일부 좌석에선 수면에 충돌함을 대비해 구명조끼 착용도 이루어졌다. 생존자인 승무원의 증언에 따르면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인지할 수 없었으며, 이상 발생 직후부터 추락할 때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거의 없이 침착히 행동했다고 한다. 18시 30분경, 승객들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불안정한 상태의 기체 내에서 필사적으로 종이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낙하 사고에선 이상 발생에서 수 초~수 분의 여유도 없이 바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으나 현 사고에선 30분 동안 비행을 계속했기 때문에 유서를 남길 시간이 생긴 경우이다.
그 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자세'를 취하였다. 기내 방송으로 유아를 동반한 부모와 유아 옆 승객에게 아이를 감싸는 방법, 신변물을 확인하고 예고 없이 착륙할 상황도 있음을 알리는 방송 등이 흘러나왔다.
조종실에선 도쿄 항공 교통 관리부를 통해 몇 번이나 "조종 불능" 신호를 전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에서 123편의 주파수 변경을 지시하나 조종 불능으로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네다 관제는 '사이타마현 쿠마가야(熊谷) 서쪽 25마일'임을 알렸다. 이때 기체는 사이타마현의 오타키촌 부근을 비행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가노현 카와가미촌에 진입할 때즈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오스타카 산 방면으로 향하는데 이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이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123편을 목격하였다. 목격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비행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위에 있는 CVR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하네다로의 귀항을 요청했지만, 조종 불능으로 인해 하네다 공항과 정반대쪽으로 계속 멀어진다.
조종석에서는 승무원 사이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지 말지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조종을 하기로 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상호간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기체는 속도와 동시에 엔진의 추진력도 크게 변동하였다. 이미 조종사에 의한 조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서쪽 570m 떨어진 계곡 너머 다카마가하라의 산등성이에 동체 후부가 꺾인 채 뒤집힌 상태로 돌격한 동체는 완파되었으나 4명의 생존자는 이 동체 후부의 좌석에 앉아있었기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낙하시 속도는 265노트(시속 490km), 사고 시각은 18시 56분경으로 "もう、だめだ!(이젠 끝이야!)"라는 기장의 마지막 음성과 충격음이 들린 후 CVR가 종료되었다.
추락
추락 직전 상승하기 위해 엔진 출력을 엄청나게 올린 상태로 지면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에 추락시 속도는 약 350kt(시속 650~700km/h)였으며 그 충격은 수백 G(중력 가속도)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충돌 과정에서 오른쪽 주날개가 지면에 닿으면서(나무에 부딪혔다는 설도 있다.) 기체 후부가 떨어져 나갔고, 여기서 떨어져나간 후부는 꼬리를 따라 떨어져 충격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생존자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본체는 그대로 산과 충돌하였고 당연히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충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일례로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 기장의 시신은 거의 완전히 불타버려 유전자 감식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확인가능한 치열 5개만 남은 아래 턱뼈로 신원을 겨우 확인했다. 타카하마 마사미 기장의 장녀 요코(洋子)는 녹음본이 공개되기 전까지의 15년간을 '519명을 희생시켜놓고는 뻔뻔히도 잘도 살아있구나'라는 전화를 정말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2000년에 녹음본이 공개되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기장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고. 참고로 요코는 아버지가 못지킨 항공 안전에 헌신하겠다는 목표로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일본항공에 현재도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늑장 구조작업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어 추락한 기체가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추락 현장에 생존해 있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잔해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밤새 지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날 9시가 되기 전 승객 상당수는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숨지게 된다. 특히 사고 수습 이후의 부검 과정에서 기체 후미의 탑승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추락 이후 사망했음이 드러난다.
참고로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자위대 헬기 조종사가 생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한 것이 일본 정부가 늑장 구조 작업을 결정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 직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많았고 헬기 소리가 들렸을 때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헬기는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해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당시 현장 환경은 퍼붓는 비, 산에 추락하여 구조하기 불리한 지형, 저녁 무렵에 추락하여 시계가 확보되지 않는 등 구조 활동이 극히 어려운 지역이었다. 당연하지만 무리한 구조 활동은 2차 피해를 유발하므로 구조 인력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에는 구조 활동을 진행할 수 없음이 상식이다. 시계도 확보되지 않는 와중에 울창한 수목 지대, 그것도 산악 지형에서 레펠 강하같은 무리수를 감행했다간 희생자만 늘리는 꼴이다.
헬기가 생존자를 확인할 수 없다고 증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3편이 추락한 시간은 오후 6시 56분경이고 8월 12일 도쿄의 일몰은 오후 6시 30분경이다. 산악 지형에서 해가 더 빨리 짐을 고려하면 헬기가 출동한 시점에서는 이미 시계 확인으로 생존자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간대를 넘어서버렸다. 계기 확인이 가능한 장비가 탑재된 핼기였다면 더할나위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구조대원이 강하할 수 없는 지형임을 알고 있는 헬기는 시계 확인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생존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밖에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걸 보인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듯,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사고 수습을 방해했다는 음모론부터 구조 활동 자체가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보도와 여기에 온갖 살을 붙여 재생산된 음모론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제기되던 기장 개인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일본 사회가 이 사건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사고 당시 보도 및 이후 제기된 무수한 음모론 중에서 특히 많은 주목을 받은 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락 현장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중성자탄에 의한 테러라는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신빙성에 대해서는 각자가 판단하자.
추락 확인 직후, 미 공군의 C-130 수송기가 탐색에 나서 20분만에 기체를 찾아냈으며, 탐색 구조 헬기가 2시간 후에 기체 추락 현장에 도착했다. 즉시 가장 가까운 주일미군 기지인 요코타 기지에 경보를 발령했고 주둔 중인 미 해병대는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구조 활동은 자위대의 책임이라며 거절하고 탐색 구조 헬기의 이탈을 요구했다. 당시 미군 측의 요청은 '우리가 당장 달려가서 구조를 개시하겠다'가 아닌 '많은 부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태이니 의료반과 헬기를 준비해두었다'였다는 모양이고 이에 자위대 측은 '감사한다. 대기 바람.'이라 답했을 뿐이라는데, 사고 직후 미군의 헬기가 현장에 도착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 헬기가 구조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에 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라는 당시 구조 헬기 승무원의 증언이 있으며 이 사실에 대해 함구령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도쿄 국제 공항에서 자위대 측에 구조대 파견 요청을 한 것은 비행기가 추락한 후 약 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유는 '정확한 추락지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조 요청을 낼 수 없다.'였다고. 그나마 123편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는 추락 이전부터 자위대 측에 전해진 상태였고, 덕분에 자위대의 대책 본부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개설돼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항공 자위대의 탐색 구조 헬기가 추락 후 1시간만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해당 헬기의 전문 분야는 해상구조였고 적외선 장비 등의 야간 구조 장비를 탑재하고 있지 않아 생존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철수했다. 덧붙이면 자위대의 제1공정단장이 사고 지점의 야간 강하를 제안했지만 울창한 수목 지대상의 야간 강하는 극도로 위험했기에 기각당했다. 이 제1공정단장은 정부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독자적으로 부대를 움직였기에 모반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훗날 좌천되었다.
헬기로 추락 지점을 파악한 항공자위대가 육상 자위대에 추락지점에 대한 정보를 전했지만, 항공 자위대와 육상 자위대의 지휘 체계가 판이하게 달라 육상 자위대가 정확한 추락 지점을 파악하고 도보로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고 만다. 추락 지점 파악에 민관경이 모두 투입됐지만, 서로 추락 지점에 대한 정보가 달라 구조대를 혼란에 빠뜨렸을 뿐. 결국 구조대가 도보로 추락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추락 후 14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전 9시였다.
일본 정부는 사고가 난 직후 전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인명 구조보다 사고 기록 수집을 우선시했다. 여기에 상술한 구조대 도달 지연까지 겹치면서, 사고 직후 도착한 의료진들은 많은 이들이 쇼크와 추위로 사망했음을 확인한다. 추락한 직후 비가 내려 큰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살아 남았으며 상기 항목에도 나오는 생존 승무원 오치아이 유미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의 신음이 들렸고 한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서로를 애타게 부르는 것도 들었다고 한다.
구조 활동을 벌였을 당시 뉴스와 신문에 생존자가 7명이라고 보도되어 있었다. 먼저 생존자로 보고된 4명 이외의 다른 3명을 더 구출하였다는 것인데, 4인이 생존한 현장에서 200m 급경사를 오른 지점에서 아사히 신문의 사회부 기자가 "지금 막 3명의 생존자 구출! 1명은 들 것이 필요없을 만큼 건강하며 구조대원에게 안겨있다"고 무선으로 보고한 것이다. 후지 테레비의 뉴스 레포트(ニュースレポート)에서도 "현장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곧이어 들것에 실린 7, 8세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 실려오고 있습니다."라고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추가로 발표된 생존자 3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디어에서 온데간데 없이 언급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8월 13일 오전 9시~10경 소방대원이 추락 현장에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오는 중학생 정도의 남자를 포함한 남성 4명의 일행을 만났는데 충격적인 현장에서 내려왔음에도 인사해도 대답 없는, 아무 말도 하지않는 수상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이이즈카 사토시 [飯塚訓]저, '추락 현장, 남겨진 사람들' p119, 5행) 사실 워낙 끔찍한 사고로 수많은 시체들이 실종되었기에 밝혀지지 않은 생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말이 없던 것일 수도 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시체를 실제로 보면 기겁하며 큰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이 사고의 시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불에 타거나 잔해 등에 훼손이 심한 시체들도 많았다.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서투른 사고 처리를 두고 자위대의 오인으로 인한 격추, 무인기와의 충돌, 또는 미국이 알면 좋지 않은 물건을 화물로 싣고 있었다는 등의 음모론도 돌았지만, 대개는 그냥 관료주의에 의한 사고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생존자가 적은 원인중에 하나는 추락 지점이 일본에서도 손꼽는 오지 군마현에서도 오지인 지역에 위치한 험한 산 중턱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변 인가도 없고 교통도 불편하고 구조인력이 접근하거나 생존자를 후송하기에 지극히 불리한 환경이어서 추락 후 무려 14시간이나 지나서야 구조가 시작되었다. 비행기가 조종불능이 된 후 30여분 동안 하네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느니 스로틀을 조종해 되도록 구조가 쉬운 평지 지역에서 선회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생존자
생존자는 JAL 승무원 오치아이 유미(落合由美, 당시 26세), 요시자키 히로코(吉崎博子, 35세)하고 장녀 미키코(美紀子, 8세), 카와카미 케이코(川上慶子, 12세). 기체 맨 끝 좌석에 있었기 때문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상태로 발견된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큰 부상없이 생존할 수 있었다.
카와카미 케이코(川上慶子, 당시 12세) : 4명의 생존 여성 중 제일 부상의 정도가 약했고 그로 인해 생존자 4인방 중 가장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아, 많은 언론들이 그녀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30년이 지난 지금 외부 언론과 일절 취재를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그 대신 사고당시 야구부 연습 때문에 가족들이랑 홋카이도 여행을 못 간 케이코의 오빠인 카와카미 치하루(川上千春, 당시 14세)를 30주기를 맞이하여 겨우 취재했다고 한다. 2002년 10월 26일 결혼해서 2004년 6월 첫 출산하고 어머니 카와카미 카즈코(川上和子, 사고당시 향년 39세)의 뒤를 이어 간호사를 했지만, 언론 때문에 육아도 어려울 뿐더러 등교 거부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사고 당일인 8월 12일은 희생된 여동생 카와카미 사키코(川上咲子, 향년 7세)의 생일이라서 더욱 비극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엄마 요시자키 히로코(吉崎博子, 당시 35세), 딸 미키코(美紀子, 당시 8세).
항공기 사고에서 모녀가 모두 생존한 얼마 안되는 사고로, 둘은 모두 얼굴과 입 근처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로 인해 미키코 양은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진으로 보다시피 치아나 얼굴에 상처가 심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해야 했으며, 고등학교 수학 여행을 제외하면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비행기를 단 한번도 못 탔다고 한다. 미키코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있으며, 엄마인 히로코가 사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취재진한테 안부만 묻는 정도다.
비번 승무원이었던 생존자 오치아이 유미(落合由美, 당시 26세).
사고 당시 비번 승무원으로 일반 승객으로 탑승하여 자기 담당 비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승무원들을 도와 승객들을 구명하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 후 2012년에 일본 항공 직원들 세미나에 당시 상황과 사고 직후 삶에 대해서 강의했다. 30년이 지난 2015년에 오사카부에 거주하고 있는 게 확인되었으며 그녀 역시 다른 3명의 생존자와 마찬가지로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있다. 유일하게 미디어에 나온 것은 항공사고수사대에서 성우가 읽은 인터뷰 뿐이다.
희생자
승무원들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 구석구석에 유언을 새기고, 마지막 사진을 찍어 남겨두었다.
카와구치 히로츠구(河口 博次, 당시 52세), 시체 겉옷의 안 주머니에 있는 메모장에 7페이지 걸쳐 쓰여진 유서. 장녀 마리코(河口真理子)는 당시 대학원 재학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학업 탓에 5일 뒤 현장에 가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하고 수첩을 가져왔다고 증언했다.
"마치코(まち子), 아이들을 부탁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타니구치 마사카츠(谷口 正勝)의 장남 아츠시(篤志)(당시 13세)는 사고 소식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했다. 죽음의 개념조차 잘 다가오지 않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 후 충격에 빠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 되면서 일본 열도를 슬픔에 빠뜨린 바 있다. 훗날 장성한 아츠시는 아버지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아버지라기보다는 항상 촐랑대는 좀 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그 무서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힘을 주려고 가족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유서를 남긴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회고했다.
당시 9세였던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고시엔이 보고 싶어서 오사카의 친척집을 방문하려 혼자 비행기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항공에서는 당시 어린이 VIP라고 해서 승무원이 현지 공항에서 보호자에게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켄 군의 어머니 미야지마 쿠니코(美谷島 邦子, 당시 38세) 씨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친척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준다는 이야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아이를 혼자 보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에 혼자 아이를 보냈다는 죄책감,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지에 대한 자책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이 여성은 몇 번이나 죽으리라 결심했으나 분명 자신처럼 자책감에 살 희망을 잃어버린 유족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유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돌렸고 이것이 후일 '812 연락회'라는 유족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1985년부터 현재도 사무국장직을 맡으며 다른 항공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일본 지역 내 각 학교를 다니며 생명 강사로 활동하는 등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여성은 33주기를 맞은 2018년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비행기가 추락한 오쓰타카 산 속에 위치한 위령비와 희생자들의 묘역, 그리고 812연락회의 활동 등을 소개했다.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스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中埜 肇)도 목숨을 잃었는데, 때문에 한신 선수들이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우승기를 바치자는 일념으로 의지를 불태워 그 해 21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한 데 이어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창단 50년만의 첫 우승이자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바친 선물인 셈, 나카노 사장은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 경기를 마치고 로커로 돌아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었고, 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선수들의 충격은 아주 컸었다고 한다. 사고가 났던 날 선수들이 받은 충격은 다음날 경기로 이어졌고, 결국 사고가 났던 다음날 경기부터 일주일 뒤의 경기까지 한신은 모두 패배하면서 6연패에 빠져버렸다. 또한 사고 닷새 뒤 시신 확인 시 그 해가 한신타이거즈 창단 50주년이라 특별히 제작했던 호랑이가 그려진 넥타이 핀을 착용하고 있어 불탄 넥타이 조각으로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사고 이후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들, 특히 모든 팀이 도카이도 - 산요 신칸센 연선에 몰려 있는 센트럴리그 팀들은 신칸센을 주로 이용해서 원정을 다니게 되었다. 다만 홋카이도와 큐슈 양 끝단에 팀이 있는 퍼시픽리그의 경우는 불가피하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 또한 오키나와에 경기가 잡히거나 스프링캠프를 떠나는 경우에도 당연히 비행기다.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으로 협박을 받던 하우스 식품 사장 우라카미 이쿠오(浦上郁夫)도 사건 종결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고 오사카 본사와 창업주인 아버지 산소에 사건 종식을 알리러 가던 중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하우스 식품은 일본의 가정요리, 특히 거리에서 카레라이스를 시연 및 판매하며 처음 보급한 회사이며, 우리가 흔히 아는 전자레인지에 넣어 손 쉽게 요리할 수 있는 '3분요리'의 시초가 하우스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고 다섯 달 전부터 이바라키현 츠쿠바시에서 열리고 있었던 1985 츠쿠바 엑스포, 사건 전날 도쿄에서 개최 되었던 코믹 마켓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가자, 구경꾼들과 당시 동인계에서 촉망받던 동인 작가 히모토 코린(緋本 こりん, 본명:이코마 아야코 生駒隆子)도 목숨을 잃었다.
일본에서 대뇌 생리학에 한 획을 그은 대뇌 생리학의 권위자이자 오사카 대학교 전임 교수였던 츠카하라 나카아키라(塚原仲晃)도 1986년부터 문부성의 주도하에 시작 예정이었던 대뇌 가소성 연구를 대비해 사고 당일 협의를 하러 갔다 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향년 51세로 변을 당했다. 실제로 츠카하라 나카아키라는 당시 세계적인 뇌 신경학자여서 일본 뇌 생리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학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오사카 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시냅스,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고인 사후 1987년 뇌의 가소성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가노쿠니야 서점에서 책이 발간되었으며 사고 발생 25년 후인 2010년 이와나미 복간 문고에서 복간되었다.
또한 일본 브레인 과학 진흥재단에서는 츠카하라 교수의 사후 업적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츠카하라 나키아키라 기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해오고 있다.
참고로 사고당시 츠카하라 교수와 위에 상술한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같은 좌석에 탔다. 미야지마군과 츠카하라 교수 사이에 탔던 여성은 당시 도쿠시마 현에 거주했었던 노닌 치에코(能仁 千延子 당시 향년 22세)였다.
현역 바이올리니스트겸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중인 혼혈인 유카와 다이아나의 아버지 유카와 아키히사(湯川 昭久) (향년 56세)도 이 당시 비행기를 타고 희생되었는데 사고 발생 한달 후 1985년 9월 16일 부인 수잔느 베일리는 유복녀 다이아나를 출산했다. 다이아나의 엄마는 남편을 잃은 후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 생전 남편의 뜻이었던 음악가의 길을 따라 딸인 다이아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2000년에 데뷔를 시켰다. 다이아나는 유복녀였기 때문에 유카와라는 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영국 법이 바뀐 뒤인 2009년 영국 고등법원 판결로 현재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다이아나는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2009년 8월 12일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520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반도 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연예인 희생자
'위를 보며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로 아시아인 최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사카모토 큐도 이 사고에 휘말려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 안타까운 건 지인의 선거유세차 오사카로 향한 것인데, 늘 이용했던 전일본공수의 여객기에 탑승하려 했지만 하필 만석이라 할 수 없이 123편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타카라즈카 가극단의 67기생, 유키구미의 키타하라 요코(北原遥子)는 장래가 촉망되던 배우였으나 이 비행기로 오사카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
한국인 (한국계) / 외국인 희생자
한국계 미국인 전옥자(당시 42세)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외국인 학교를 다니던 아들 크리스토퍼 킴 한가위(당시 16세)와 스코트 킴 한솔(14세)를 데리고 남편이자 당시 오사카 중앙일보 판매 위원장이던 김종욱을 만나러가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 사고 당시 남편 김종욱의 이종사촌 형이자 서울특별시청 뒤에있는 뉴 국제호텔 회장이었던 김유만이 전옥자의 친정 식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세 모자가 사고기에 탑승했다고 연락했고, 전옥자의 남동생 전유식이 도일하여 세 모자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김종욱의 식구는 68년 결혼 후 72년 미국으로 이민해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77년 귀국하여 외국인 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외국인 학교 교우 바비킴은 크리스토퍼는 성적이 굉장히 우수했지만 비행기 사고로 비명횡사해 안타깝다고 전했다.
한국인 희생자는 3명이다. 안시오(安時燠, 당시 52세), 정순덕(鄭順德, 당시 47세), 이혜경(李惠慶, 당시 21세)이며
안시오는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 한국인으로 살다가 사고 발생 10년 전부터 계속 한국을 오가며 송이버섯을 취급하는 식품 수출업을 하였다. 이후 사고 발생 5년 전인 1980년 부인 오공순(당시 나이 32세)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안희경(당시 4세), 차녀 안연정(당시 3세), 아들 안도영(1세)을 두고 있었으며 송이버섯 수출민 지문 날인문제로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오봉을 지내기 위해 오사카의 친척집으로 가던 도중 변을 당했다.
정순덕은 당시 큰 딸인 정화(당시 28세)와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의류업을 했다. 실제로 정순덕은 전 영화배우 최지희의 친척인데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터를 잡은 최지희의 초청으로 큰 딸과 의류상을 했으며 작은 딸 영화(당시 24세)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였다. 정순덕의 여동생 정영순(당시 38세)는 일본에 있는 조카 정화로부터 정순덕이 오사카에 수금하러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이혜경은 도쿄에서 연극을 전공하던 유학생으로 1984년 12월 유학길에 올라 생활하던 중 사고 당일 오사카에 있는 셋째 친언니를 만나러 가는 도중 변을 당했다. 1985년 9월 귀국 예정이었으나 귀국을 1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국제 결혼한 영국인 킴블 매슈즈와 니시구치 마사코(西口 昌子) 부부가 신혼 여행을 마치고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만석이었던 만큼 외국인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다. 중국인과 독일인 희생자가 각각 1명, 미국인 희생자는 6명.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인 희생자 6명중 3명은 한국계이다. 상기한 3명의 한국인과 합하면 한국 혈통의 사망자는 6명이다.
사고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인 1978년 6월 2일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후미가 파손되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격벽(벌크헤드)이 파손되어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2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해야 하는데, 보잉의 기술자(정비 총 담당자)는 수리하면서 보강판을 쪼개서 고정한 탓에 2줄의 리벳과 1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 두 개로 고정하는 효과가 나게 되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자만한 태도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수리 이후 비행을 계속하면서 기압 변화에 따른 금속 피로가 누적되다가 이 벌크헤드가 터져나가자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가 날아가버렸다. 이 때 승강타, 방향 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 분배기인 토크 박스까지 터져 유압이 새어나갔고, 결국 유압과 조종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TBS 테레비에서 이 부실한 수리에 참여한 40여 명의 수리공 중 한 명을 인터뷰했는데, 자신들의 수리가 원인이 아니며 그 근거로 사실 이중 철판은 자신들이 수리하기 이전에 애초에 두 장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1978년 테일 스트라이크 때문에 동체가 약간 변형됐는데 수리 후에도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기체가 이미 뒤틀려 생긴 문제로 당연히 정상이 아니다.
다만 사고의 주 원인은 벌크헤드 파손이지만, 이후 폭발적인 감압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폭발적인 감압이 없었다고 하는 측에서는 조종실 음성 기록을 근거로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 여유가 있었음을 지적하지만, 폭발적인 감압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조건 그 직후 기내의 사람들이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보통 이 상태에서는 순간적으로 수증기 응결이 일어나므로 감압을 알 수 있으며 자동(수동 가능)으로 산소 마스크가 좌석 근처에서 터져나온다. 때문에 아무리 감압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을 잃기 전 산소 마스크를 쓸 정도의 여유는 있다.
사고 후
일본 측은 사고 원인 조사 후 보잉을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발했으나 기각당했다. 일본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총 7억 8천만 엔을 조의금 명목으로 지급했으며 회장은 퇴임했다. 그리고, 115편 테일스트라이크 사건당시 기장과 부실한 수리로 520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 정비 총 담당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에서도 부실한 수리 방법을 제안했던 정비 주임이 자살했었다. 만약에 정비 총 담당자가 사죄만 하고 생존해 있었으면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 징역을 구형받았을 수도 있고, 설령 출소를 한다고 해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격렬한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얼굴조차 못 들고 평생을 괴롭게 살았을 확률이 더 높다.
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직후, 결정적인 과오를 저지른 항공 관제사인 페테르 닐센이 유가족의 복수로 살해당한 사례가 있었다. 피의자의 주장으로는 살해하려 의도한 것은 아니나, 힘들게 찾아간 닐센의 집에서 신경질적인 응대를 받아 우발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곤 하나, 이미 자신이 흉기를 들고 찾아간 것부터 신빙성은 없었다. 하지만 스위스 사법부는 사고의 여파로 인해 우울증을 앓던 피의자의 정신상태를 정상침작하여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2년 형만 집행했으며, 복역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암암리에 영웅 대접을 받았고 본국의 건설부 차관까지 임명받게 된다. 대형 사고 유발자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어떤지 정확히 알려주는 일화다.
이 사고의 정비 담당자도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본 최악의 항공 사고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잉 측의 정비가 올바르지 못했음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항공은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 동안 시달려야 했다. 보잉이 주요 고객인 일본항공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항공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다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일본이 미국에 패전 이후 대놓고 따질수 없어 보잉의 이미지 실추를 우려한 미국의 압력에 자국 기업을 희생양 삼았던 것이라 추측할수 있다.
사족으로, 이 사고로 인하여 일본항공은 물론이고 일본의 모든 항공업계가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국내선 항공의 수요는 25%나 감소했으며, 이마저도 많은 이들이 일본항공 대신 전일본공수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사고 이전에도 일본 항공은 경쟁사인 전일본공수보다 신뢰가 떨어졌고 국내외에서 추락사고가 많았으며, 당장 이 사고로 사망한 사카모토 큐도 원래는 일본항공을 신뢰하지 않아 전일본공수의 항공기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
이 사고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일본항공은 이 사고 이후 현재까지 인명사고를 단 1건도 내지 않고 있다. 다만 원가절감을 이유로 정비를 아웃소싱하는 상태며, 이 사고 20주년 기념으로 위령제를 지낸 2005년 8월 12일 후쿠오카에서 호놀룰루로 가던 JALways(JAL 소속의 저가항공사)의 DC-10이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화염을 내뿜으며 부품을 시가지에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 후 40년 가까이 지난 2020년에 이르러서도, 이 사건과 더불어 한번 파산한 JAL을 신뢰할 수 없어 전일본공수(ANA)만을 이용하거나, 가격이 비싸 ANA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JAL이 아닌 저가항공기를 사용하는 일본인도 여전히 많다. 그정도로 일본인들의 기억속에 큰 충격으로 남은 사건인지라, 굳이 항공에 관심이 없는 사고 이후에 태어난 젊은 사람이라도 '123편' 이 사고 하나만은 대부분 알고 있다.
2012년 10월 일본 WOWOW 방송에서 <능선의 저편에~아버지와 아들의 일본항공 사고>라고 하는 제목의 2부작 드라마로 이 사고를 각색하여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여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큰 줄기인 사건의 내용이나 중요한 에피소드들은 세세하게 사실로 배치하고, 주 스토리가 되는 세 가족의 이야기는 가상의 가족으로써 행복한 모습을 극대화 시켰다가 사고 이후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내용을 좀 더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쿠니무라 준, 이시다 유리코, 하기와라 마사토, 히로스에 료코, 마츠자카 토리, 칸지야 시호리 등 연기파와 스타 배우들이 총 출동하는 화려한 라인업을 보여주었고, 드라마 자체도 굉장히 잘 만들어졌다는 평. 2부작임에도 합동분향소와 유가족 대기실 세트장을 크고 그럴 듯하게 잘 만들고, 엑스트라들도 아낌없이 투입하여 실제의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잘 살렸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치비 VIP 시스템이나, 13살 소년의 현장에서의 실신, 812 유가족 모임 등도 보여주면서 내용 자체에 자연스레 사실을 녹아내리게 하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느낄 수 있다.
2018년 8월 16일 사고 33주년을 맞아 후지 테레비에서 "8.12 일본 항공 점보기 추락 사고 33주년의 진상"을 방영했다.
예방?
이 사고 이후 조종사들을 모아서 모든 유압과 꼬리날개의 세로방향 안정 기능을 전부 상실한 상태의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을 훈련했는데, 단 한 명의 조종사도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키지 못했다. 착륙은 커녕 단 한명도 타카하마 기장이 버텼던 32분까지 버티지 못했다.
참고로 모든 유압을 상실한 기체가 그대로 추락하지 않고 아무튼 착륙이라도 한 경우는 1989년 7월의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사고와, 2003년 11월 22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는 DHL의 A300 화물기가 이라크 반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피격당해 왼편 날개 일부 손상으로 3계통의 유압을 모두 상실한 후 바그다드 국제 공항에 비상 착륙한 두 건 뿐이다. 이외에는 미국의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폭격기도 비행 시험 중 수직 꼬리 날개가 통째로 뜯겨나간 일이 있었으나 이쪽은 유압 계통은 무사해서 제어가 가능한 덕분에 무사히 착륙했다. 각각의 해당 문서 참조.
NASA 드라이든 연구소는 Propulsion Controlled Aircraft(PCA)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는데 유압이 상실되었을 때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만을 통하여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으나 항공기가 유압이 나갈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이유로 이의 채용은 항공사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이 장비를 장착한 항공사는 2014년 시점에도 한 곳도 없다. 다만 이는 항공업계의 안이함 때문만은 아니고 이 프로그램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골자는 모든 유압이 나간 상태에서 좌우 엔진 출력으로 선회하고 상승과 하강을 조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정상인 상황에서 '유압회로'만 전멸한 경우에 쓸 수 있다. 하지만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DHL기 SA-7 피격 사고를 볼 때 어느 정도 항공기에 손실이 있어도 엔진 출력만으로 비상착륙 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DHL기는 날개가 손상되어 항력이 비대칭적으로 발생했고 연료가 새어 나가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JAL 123편이 유압 계통 완전 소실 후에도 30분이나 비행한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이 때문이다. 만약 비행 균형 유지에 이상을 끼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고 발생 직후 회복 불가능의 회전을 일으켜 즉시 추락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때 추락했으면 항공유를 가득 실은 B747이 도쿄 한복판에 추락해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은 더 끔찍한 사고가 되었을 것이다.
자녀 셋을 한 번에 잃은 다부치 싱고씨와 그의 부인의 사연이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다부치 요코(향년 24세), 미치루(향년 20세), 준코(향년 14세) 세 자매는 여름방학을 맞아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123편에 탑승했다가 모두 사망했다. 모친은 딸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술로 해소하며 살았고, 남편은 그런 부인을 돌보며 심신이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27년이 지난 후 2010년, 계속된 폭음으로 쓰러진 부인이 꿈 속에서 장녀인 요코를 만났는데, 딸은 어머니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면서 강하게 질책했다고. 이에 마음을 고친 어머니는 그 이후로 술을 끊고 뒤늦게 812연락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2018년 33주기때 부부 모두 8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험한 오쓰타카산에 올라 딸들의 묘를 찾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기타
민간 항공 업계의 1985년도는 항공 사건사고의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85년은 사상 최대 항공 재난의 해(1985년 12월 13일자 경향신문)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대형 항공 사건사고가 4건이나 터졌던 해가 1985년이었으며, 그리고 29년 후 같은 참사가 반복되었다.
개그맨이자 국민 MC 아카시야 산마도 원래 일본항공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전일본공수로 갈아타서 화를 면했다. 그리고, 아카시야 산마는 이 때의 트라우마로 1년 가까이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도쿄와 오사카를 왕복할때는 신칸센을 이용하게 되었다. 산마의 좌우명 '生きてるだけで丸儲け(살아있는 것만으로 이득)'는 이때 생겨났고, 딸 이마루의 가명도 저 좌우명을 줄여 붙인 것이다. 하지만 코이즈미 쿄코는 사고 당일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올 때 123편을 이용했다고 저녁 음악프로그램에서 스스로 밝혔다.
희생자를 늘린 원인으로 당국의 늑장대응이 지목되는 점이 훗날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비슷하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 두가지중 하나는 세월호 참사의 승무원들은 제 목숨이 아까워 탑승객들을 외면한 채 가장 먼저 탈출한 반면 123편 추락사고의 승무원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이 사고의 경우 애초에 사고 당시에는 구조하기가 상당히 힘들고,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상기한 바와 같다.
테일 스트라이크로 파손된 기체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고는 이 사고가 터진 지 17년 후에 또 반복되었다.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가 바로 그것인데 1980년 2월 7일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착륙하다가 발생한 테일 스트라이크로 파손된 부분을 대충 땜질만 한 채 계속 운항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 문서 참조.
산의 날이 지정될 당시 사고가 났던 8월 12일로 정하려 했다가 군마현 측에서 반대하여 8월 11일로 변경됐다.
2017년 8월 12일, 도쿄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오사카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ANA 윙스 37편 비행기가 기체 이상으로 인해 긴급 착륙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고와 날짜, 사고 시각, 비행 경로가 정확히 일치한다. 본 영상 유튜브 댓글에는 123편의 희생자들이 비행기의 안전추궁으로 항공안전에 경종을 울리고 더더욱 안전한 비행을 원하는 희생자들의 마음이라는 댓글과 우연에는 분수가 있다며 기묘하고 오싹해하는 댓글도 있었다. 영상 대부분의 댓글들 중 123편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며 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고가 일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사고 기체가 산이 아닌 운 좋게 바다로 미끄러지듯이 착륙을 했다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520명씩이나 사망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허드슨 강의 기적과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다만 문제점은 이 사고 기체가 테일 스트라이크로 인한 벌크헤드 손상으로 조종이 불가능했고 방향타의 파손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바다에 착륙하는 기술은 상당히 어려우며 이때 사고기가 추락할 때 속도는 시속 600km가 넘었고 이 상태로 바다에 착륙하면 땅에 충돌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며 바다의 특성상 전부 수장되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안 나올 확률도 높다. 일례로, 에티오피아 961편 사고에서도 바다에 착수했으나 동체가 부서지는걸 피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다만 이 사건은 승객들이 너무 이르게 구명조끼에 공기를 불어넣은 것이 사망자 확대의 화근이 되었긴 했지만.
야후 재팬이나 구글에서 해당 항공기명을 검색하면 사망자 시신의 사진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 언론사들이 모자이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송이나 기사 등을 통해 사진들을 올려버렸기 때문. 심신미약자 등은 해당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하지 않는 것을 권한다.
훗날 제34대 육상자위대 육상막료장이 되는 오카베 도시야가 당시 구조활동 제1진의 소대장으로 참여하였다.
2020년 8월,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편성된 JL123편이 35년만에 포착되었다.
미디어에서
추락 후 30분이 지나고 나서 일본 방송에 속속 속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테레비 아사히(ANN)에서는 쇼 프로그램 '월요 스페셜 90'이 방송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479명이 탄 하네다 발 오사카 행 일본 항공 여객기가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했고, 쇼 프로그램 도중에 뉴스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소식을 전했다.
닛폰 테레비(NNN)에서는 생방송인 '더 톱 텐(ザ・トップテン)'이 막 시작되고 남녀 진행자(사카이 마사아키, 사카키바라 이쿠에)가 참가자를 소개하는 시점이었다. 문제는 해당 방송이 생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남자 진행자가 '잠시 긴급 뉴스 때문에 뉴스 스튜디오로 장면을 바꾸겠으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보도국으로 장면이 전환되어, 추락 장소(나가노 현 키타아이키무라촌) 등 상세한 정보를 전했다. 이런 상황이 프로그램 진행 중 3~4번 반복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코이즈미 쿄코는 방송 당일, 123편에 사용한 것과 같은 비행기(JA8119)로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왔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 종료 후 바로 뉴스 속보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
NHK에서는 다큐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내고, 속보 프로그램을 편성해 '여객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라는 방송을 했다.
NHK를 포함해 주요 방송사들은 사고 직후 철야방송을 통해 사고 속보를 전했다.
항공 사고 수사대 3편에서 이 사고에 대해서 방영하였다. 한국어판 제목이 "늑장 대응의 대가"인데 상당히 비유적이다.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고를 모티브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명으로 2009년에 와타나베 켄 주연의 영화, 2016년 WOWOW에서 카미카와 타카야 주연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유키야샤 전설 살인사건의 비행기 사고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의견이 있다.
사이코메트러 에지의 에피소드 중에서 비행기 사고로 자폐아가 된 소녀의 이야기도 이 사건을 모티브 삼는다.
갓핸드 테루의 마히가시 테루가 겪은 천하 항공기 추락 사고 역시 이 사건을 참조로 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사이코 닥터 시리즈 중 1부에서 주인공 카이 쿄스케가 대학 시절에 사랑했던 여대생의 죽음을 조사할 때 이 사건이 언급된다.
2018년 3월 1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여러 음모론들 중 군부대에서 비밀 훈련 작전을 진행하던 중 날린 표적기가 기체와 충돌했다는 설에 중점을 뒀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있다.
한국에서 본 사건를 소재로 한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가수 루이(LUEY) "루(淚)-그대가 힘들면"이라는 이름으로 2001년 말에 제작되었다. 앨범 발매 전에는 약 6~7분 가량의 긴 분량의 버젼이 엠넷 등의 케이블 방송에서 파일럿 형식으로 사전 공개 되었다. 사고과정이 조금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조종사들이나 탑승객들의 모습이 조금 더 비중있게 나오며, 이의 배경 음악으로 '루'의 MR 파트가 중간에 추가로 삽입된다. 하지만 후에 나온 버젼에서의 시작과 끝부분에 들어가는 신문보도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문구가 없던지라, 해당 항공 사고를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그냥 뮤직 비디오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극본 정도로만 생각할 정도다.
그리고 앨범 발매 이후에는 위의 영상과 같은 원곡의 길이에 맞춰 재편집되고 전반부의 신문보도 자료와 후반부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문구가 추가로 삽입된 5분짜리 버젼으로 정리되었다. 이 사고로 한국인도 여섯 명이 희생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이 위 뮤직 비디오에서 하지원이 연기한 인물인데, 이 인물이 가수 루의 소속사 빅캐스트 스타플러스 사장 이규덕의 조카인 이혜경이라는 사연이 1집 활동 당시 소속사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뮤직 비디오 초반부에 하지원의 배역 소개에서 한문 자막으로 나오는데 실제 인물의 본명이다.
실제 이 인물은 재일교포로 연극을 공부했으며 귀국 한달을 앞두고 홀로 항공편에 올랐다가 안타깝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으나, 사귀던 애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뮤직 비디오에서의 극적인 연출을 위한 설정이었을 뿐 모델이 되는 이혜경은 당시에 애인이 없던 평범한 20대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수가 맡은 이혜경의 애인으로 나오는 김태우라는 캐릭터는 사실 가공인물이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속 영원한 루저 나카무라 쇼토쿠가 자위대에 있을때 이 사고의 처리에 참가했다는 뻥을 쳤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처음 작품을 그릴 당시에는 나카무라가 직접 경험담이랍시고 이야기를 했지만 나중에 들춰보니 그 이야기는 나카무라의 선배의 경험담으로, 나카무라 본인은 파견나간 적이 없었다. 뽀록 난 후 나카무라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JAL123기 관련 자료와 위 만화를 실은 겐분 매거진(고바야시 모토후미가 부정기적으로 발간하는 개인지) 특별호가 발매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료집 용도로는 다소 부족한 편. 이외에 JAL123기 파편과 희생자들 사진이 실린 사진집이 발매된 적도 있었으나 엄청난 항의에 못이겨 바로 절판되었다. 넷상에서는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을 구할 수 있으나 실제 희생자 사진을 적나라하게 실었으므로 열람은 권하지 않는다.
영 제로 문신의 소리에서는 항공기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타키가와 요시노라는 NPC가 등장한다. 본작(1989년) 1개월 전 터진 항공기 사고에서 유일하게 구조되었으며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가족들의 시신에 둘러싸여 공포에 떨었다고 하니 본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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